혁명적인 정치실험의 와중에 있는 대한민국
페이지 정보
작성자 아리수 댓글 0건 조회 703회 작성일 08-06-03 17:49본문
찰리 채플린의 영화에서 트럭에서 떨어진 붉은 깃발을 집어 들자 지나가던 시위대는 깃발을 시위대의 선봉인줄 알고 그 뒤를 따른다.
엉겁결에 시위의 선봉에 서게 된다. 앨런 포우의 <편지>에 보면 왕비 앞으로 배달된 편지는 그것이 배치되는 자리가 달라짐에 따라 편지에 관계되는 사람들의 입장이 다르게 됨을 잘 보여준다.
왕비와 관련된 편지를 왕비가 갖게 되고 정치적 꼼수를 찾던 장관이 그것을 목격하게 되고 마침 왕이 오자 왕비는 그 편지를 책상 위에 놓자 장관은 편지를 훔친다.
왕비는 편지를 찾기 위해 사설탐정을 고용하고 이제 그 편지는 장관의 집에 배치된다. 처음에는 왕비와 왕 그리고 장관의 배치에 있던 편지는 장관이 훔쳐가서는 장관과 왕비 그리고 사설탐정이란 3자의 배치의 공간으로 바뀐다.
위에 든 사례는 구조주의가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즉 편지가 놓이는 위치에 따라 사람들의 역할이 다르게 배치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유가 나오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바로 주체가 능동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구조가 능동적인 역할을 선취한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다.
주체가 원인이 아니라 구조가 원인이며 주체는 그 구조의 결과라는 것이다. 그런데 구조주의를 잘 들여다보면 주체와 구조의 관계가 주체를 뒤집으면 구조가 되고 구조를 뒤집으면 주체가 됨을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주체든 구조든 모두 결정론적 사유체계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2008년 시위는 이런 결정론에 기초한 시위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데 정부는 이번 시위가 위와 같은 결정론적 사고에 기초한다고 있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이에 대한 대응도 기존의 진압 방식을 그대로 답습했다.
이러한 대응은 이번 집회의 본질을 전혀 읽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번 촛불집회의 특징은 촛불집회라는 결정론적 배치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그 구조에 주체가 종속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또한 주체가 유일한 능동적인 결정의 요인 같지만 촛불집회의 구조가 선취요인으로 작용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즉 이번 촛불집회는 촛불집회의 구조와 주체의 결합방식으로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행위양식에서는 주체라는 선봉이 없이 흩어졌다가 모이고 다시 흩어졌다가 모이고를 반복한다. 정착이 아니라 유목 배치구조를 띤다.
이것은 웹 기반에서의 정보 노마드 체험이 촛불집회에 전이된 것이다. 이것은 기존의 사고양식으로는 전혀 설명되지 않는 새로운 정치참여방식이다.
이것은 익명의 잠재성의 장이 현실화된 거대한 정치적 사건이다. 새로운 정치혁명의 막이 열렸음을 의미한다. 기존의 행정, 입법, 사법체계와 정치인, 언론인, 관료 권력으로는 이 새로운 정치참여형태를 수용할 수 없다.
따라서 기존의 권위체는 변혁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변혁의 힘을 기존의 체계로는 담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것을 역행하려고 해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미증유의 혁명적인 정치실험의 와중에 있다
엉겁결에 시위의 선봉에 서게 된다. 앨런 포우의 <편지>에 보면 왕비 앞으로 배달된 편지는 그것이 배치되는 자리가 달라짐에 따라 편지에 관계되는 사람들의 입장이 다르게 됨을 잘 보여준다.
왕비와 관련된 편지를 왕비가 갖게 되고 정치적 꼼수를 찾던 장관이 그것을 목격하게 되고 마침 왕이 오자 왕비는 그 편지를 책상 위에 놓자 장관은 편지를 훔친다.
왕비는 편지를 찾기 위해 사설탐정을 고용하고 이제 그 편지는 장관의 집에 배치된다. 처음에는 왕비와 왕 그리고 장관의 배치에 있던 편지는 장관이 훔쳐가서는 장관과 왕비 그리고 사설탐정이란 3자의 배치의 공간으로 바뀐다.
위에 든 사례는 구조주의가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즉 편지가 놓이는 위치에 따라 사람들의 역할이 다르게 배치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유가 나오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바로 주체가 능동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구조가 능동적인 역할을 선취한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다.
주체가 원인이 아니라 구조가 원인이며 주체는 그 구조의 결과라는 것이다. 그런데 구조주의를 잘 들여다보면 주체와 구조의 관계가 주체를 뒤집으면 구조가 되고 구조를 뒤집으면 주체가 됨을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주체든 구조든 모두 결정론적 사유체계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2008년 시위는 이런 결정론에 기초한 시위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데 정부는 이번 시위가 위와 같은 결정론적 사고에 기초한다고 있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이에 대한 대응도 기존의 진압 방식을 그대로 답습했다.
이러한 대응은 이번 집회의 본질을 전혀 읽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번 촛불집회의 특징은 촛불집회라는 결정론적 배치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그 구조에 주체가 종속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또한 주체가 유일한 능동적인 결정의 요인 같지만 촛불집회의 구조가 선취요인으로 작용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즉 이번 촛불집회는 촛불집회의 구조와 주체의 결합방식으로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행위양식에서는 주체라는 선봉이 없이 흩어졌다가 모이고 다시 흩어졌다가 모이고를 반복한다. 정착이 아니라 유목 배치구조를 띤다.
이것은 웹 기반에서의 정보 노마드 체험이 촛불집회에 전이된 것이다. 이것은 기존의 사고양식으로는 전혀 설명되지 않는 새로운 정치참여방식이다.
이것은 익명의 잠재성의 장이 현실화된 거대한 정치적 사건이다. 새로운 정치혁명의 막이 열렸음을 의미한다. 기존의 행정, 입법, 사법체계와 정치인, 언론인, 관료 권력으로는 이 새로운 정치참여형태를 수용할 수 없다.
따라서 기존의 권위체는 변혁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변혁의 힘을 기존의 체계로는 담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것을 역행하려고 해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미증유의 혁명적인 정치실험의 와중에 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