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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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역사는 미래다 댓글 0건 조회 762회 작성일 08-05-19 10:52본문
<칼럼>박정희 부국부민 국민총화관점서 뉴라이트 선진화운동을
3만명 힘들게 했지만 3000만명 윤택하게 만드는 소신 가져야
[데일리안 박재목 칼럼니스트]평소에 박정희 전 대통령은 “절대로 현재를 과거의 갈등과 혼돈에 매몰시켜 미래를 놓치는 실수를 거듭하면 안 된다.”라며 미래적 가치실용을 강조했다.
3만명 힘들게 했지만 3000만명 윤택하게 만드는 소신 가져야
[데일리안 박재목 칼럼니스트]평소에 박정희 전 대통령은 “절대로 현재를 과거의 갈등과 혼돈에 매몰시켜 미래를 놓치는 실수를 거듭하면 안 된다.”라며 미래적 가치실용을 강조했다.
영국의 정치 거장 윈스턴 처칠(Winston Leonard Spencer Churchill)도 정계 은퇴를 앞두고 “과거의 일을 현재의 잣대로 처리해 버리면, 우리는 미래까지도 포기해 버리는 것이 된다”라고 갈파했다.
이런 미래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정신을 이어 받았는지 모르지만, 최근 이명박 대통령도 미래기획위원회 첫 회의를 주재하면서 “우리 사회가 과거와 싸우면서 많은 것을 허비하고 있기 때문에 희생되는 것은 미래 밖에 없다”라고 걱정했다.
과거와 싸우면 미래는 필연코 희생될 수 밖에 없어
이처럼 박정희 역사가 오늘에까지 살아서 미래를 일구어가는 힘은 그 자체가 신화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박정희 전 대통령의 국가경제개발 신화와 정신, 그리고 민족 웅비의 진정한 가치를 가장 많이 받은 수혜자는 과연 누구일까?
3만 명을 힘들게 했지만 3000만 명을 배부르고 윤택하게 만든 박정희 도약의 혜택은 아마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이명박 현 대통령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21세기 박정희 신화의 표상인 두 명의 전-현직 대통령은 가난과 굶주림의 한계선상에서 허덕였다.
아예 둘 다 지방에서 대학진학도 포기한 채 상업고등학교에 들어가야 했다. 그중에서 한 사람은 형편이 좀 나아 서울의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오직 가난을 잊고 가난을 이기기 위해서 열심히 살았다. 이념도 실용도 배부르고 난 다음의 문제였다.
이것이 60~70년대 당시 우리 삶의 흔적이자 참 모습이었다. 주린 배를 움켜 잡고 토담방 호롱불 아래서 오직 총명한 머리와 미래의 꿈하나 믿고 노력했다. 사법시험은 압축성장 시대에 권력과 돈의 혜택으로 가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었다. 그 후 판사와 변호사를 거치며 당연히 큰돈도 벌었다. 연이어 국회의원과 장관 그리고 위대한 대한민국의 제 16대 대통령직도 충실히 수행했다.
서울의 좋은 대학에 진학한 다른 한 사람도 비록 어렵게는 공부했지만, 박정희 성공신화의 직격탄 덕분으로 경제발전의 선두에 선 기업의 회장과 국회의원, 그리고 서울시장을 거쳤다. 결국에는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망월동 묘지에서 5.18 기념사도 멋지게 했다.
박정희 혜택 표상,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이명박 현 대통령
이것이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삶의 처연한 흔적이자 박정희 신화의 산물이다. 그리고 이것이 역사가 되고 계속 미래가치로 확산되고 있다. 또한 근면-자조-협동의 새마을정신이 창조적 자본주의의 표상이 되고 있다. 반만년 이어져 온 보릿고개의 굶주림에서 우리 모두를 벗어나게 한 신화가 박정희 정신이다.
박정희 이전 한민족은 갈등과 반목, 질시와 비난으로 일관했다. 도저히 무엇 하나라도 이루어 낼 수 없게만 보였던 의지 상실의 백성이었다. 가난에 찌들어 ‘남의 탓, 과거 탓, 주변 탓’에 사로잡힌 닫힌 통념의 인식구조에 젖어 있었다.
그러나 국민총화(國民總和)의 의지 앞에서는 사촌 논 사면 내 배가 먼저 아프고, 무조건 반대부터 하고 보는 비판과 비난의 폐단들이 일시에 타파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반만년 누적되어 온 고답적인 가치관들이 베를린 장벽처럼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결국 한 인간의 의지와 조국과 민족을 위한 충성과 헌신의 산물이었다. 작은 것이 큰 변화를 일으키고, 도무지 움직일 것 같지 않던 거대한 역사의 장벽이 한 위대한 영도자의 의지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다.
우리는 그 때 처음으로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것을 깨우쳤다. 닫히고 못나고 가난한 역사도 국민총화의 의지 앞에서는 약간의 힘만으로도 여지없이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한민족 우리 모두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이처럼 박정희 국가발전의 모델인 경제개발계획과 새마을운동은 신화이기 이전에 차라리 신드롬이자 전염병이었다. 전염되기 쉬운 작은 가치들이 커다란 사회변혁을 주도했다. 적은 변화와 작은 행동들이 커다란 국가발전의 초석을 깔았다. 이런 전염은 적극적인 어느 한 순간에 빠른 속도로 불붙었다. 결국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던 북한경제를 앞서기 시작한 것이다.
매킨지(McKinsey)의 흑백사진
역사적으로 가장 위대한 인물을 꼽는 잣대는 무엇이 가장 타당할까? 관점에 따라 조금은 다르겠지만 전쟁시에는 적대국 또는 평상시에는 이웃 나라 사람들의 존경과 찬사를 받는 인물이 진정으로 위대한 인물이 아닐까?
이런 점에서 통일신라의 장보고와 최치원, 고려의 이제현, 조선의 이황과 이이, 그리고 충무공 이순신 장군 등을 우선적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분들의 공통점은 지금도 중국이나 일본 등에서 자기들 스스로 추모행사를 벌이거나 기념관을 짓고 있으며, 이들이 국가와 민족중흥을 위해 가졌던 정신이나 가치관을 오늘에 되살리려고 우리보다 더 노력하고 있다는 점이다.
21세기 지식기반경제의 글로벌 세계화 시대에 이른바 세계 3대 전략 컨설팅회사로 꼽히는 것은 보스턴컨설팅그룹(BCG), 베인앤컴퍼니(Bain & Company)와 함께 매킨지(McKinsey)이다.
이들 중 매킨지의 아시아-태평양본부 총괄사장인 도미니크 바튼은 21세기 들어 지금까지 계속하여 한국의 ‘정부-기업-소비자-노동계’ 등 4대 경제주체간의 신뢰부족을 지적하여 왔다.
또한 지나친 폐쇄 지향적 의식구조의 문제점을 들면서, 과도한 규제, 수시로 바뀌어 혼선을 자초하는 정부의 정책비전, 그리고 유연성 부족 등으로 잘못하면 한국경제에 치명적인 공백이 올지도 모른다고 경고하고 있다.
그런데 그에게는 특이한 점이 하나 있다. 그는 서울 태평로 자신의 집무실에 1970년 4월 1일 경북 포항의 황량한 모래벌판을 찍은 커다란 흑백사진을 걸어 두고 수시로 바라본다고 한다.
사진 속에 서 있는 세 사람은 다른 아닌 박정희 전 대통령, 박태준 전 포항제철 사장, 김학렬 전 경제부총리다. 한국 경제도약의 상징인 최초 일관제철소인 '포항종합제철소' 착공식 사진이다.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가장 존경하는 세계적 CEO라고 지금도 세계를 돌며 칭송하고 있다. 그 이유로는 미래를 보는 통찰력, 글로벌 마인드, 역사에 대한 책임정신, 국가와 민족을 세계의 자랑거리로 만들고자 한 의지, 선진조국 만들기의 자신감과 ‘근면-자조-협동’의 새마을정신 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난 60~70년대 국민총화로 이룩한 대한민국 경제발전 동력은 90년 이후부터 계속 그 성장엔진의 마력(馬力) 수를 잃어가고 있다. 경제성장의 추동력 지표인 잠재성장률이 계속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는 호조(好調)로 전환되는 급격한 변화의 기회를 말한다. 박정희 이후 우리는 국가발전의 새로운 도약을 기약하는 제2 한강의 기적을 일구는 티핑 포인트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정치는 지역·이념·권력으로 갈려 끊임없는 투쟁과 갈등으로만 점철했다. 그래서 결국 그동안 닦아 놓고 쌓아 놓은 미래가치를 갉아먹는 것에만 중독되고 말았다.
MB, 호조(好調)로 전환되는 급격한 변화의 기회를 포착해야
인류 역사는 항상 인간이 원하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의 직관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이처럼 박정희 시대 이후 한국사회 그 어디에도 말콤 글래드웰(Malcolm Gladwell)가 말한 티핑 포인트의 세 가지 법칙인 △소수의 법칙(the Law of the Few) △고착성 요소(the Stickiness Factor) △상황의 힘(the Power of Context)인 신드롬과 발전의 전염병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건국 60년을 맞은 대한민국은 지금 정치의 신뢰상실 뿐 아니라 경제상황까지도 심각한 '4대 복병'의 후폭풍에 휘청거리고 있다. 바로 적색경고등이 켜져 의무만 있고 아무 책임도 없는 불쌍한 민초들만 계속 힘들어지고 있다.
워낙 원자재 대외의존도가 높고 수출의존도가 세계 최고수준이기 때문에 정부는 폭등하는 물가를 보고도 대책에는 속수무책일 수 밖에 없다. 급등하는 환율문제도 약 1.8% 정도의 지구촌 경제규모를 가지고는 방어나 대처에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래서 수입물가 압박을 가만히 앉아서 견뎌내야 할 형편에 처하고 말았다.
자원민족주의와 에너지국가주의로 고착화된 고유가는 그칠 줄 모르고 계속 오르고 있다. 그래서 유가 폭등은 바로 우리 경제에 주름살로 자리 잡았다. 여기다가 물가를 우려한 금리동결은 경기부양을 위한 경제정책에 제동을 거는 악순환을 초래했다.
그래서 '이명박 정부'는 어이없게도 출범과 동시에 ‘고물가ㆍ고환율ㆍ고유가ㆍ고금리'의 한국경제 4대 '고질병'의 복병을 만난 불행한 정부라고 말할 수 있다. ’7-4-7 MB노믹스‘의 경제 살리기를 국민들에게 약속했지만, 대외 여건이 준비된 경제대통령 구호를 무색케 만들고 있는 것이다.
경제 성장을 위해 갈 길이 바쁘지만 대외경제 여건이 발목이 잡는 형국을 만들고 있다. 그러자 친북좌파 세력들은 바로 정권타도에 이를 빌미로 삼아 악용하면서 정권 무능과 정책 실정으로 연계해 나가고 있다.
이런 미래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정신을 이어 받았는지 모르지만, 최근 이명박 대통령도 미래기획위원회 첫 회의를 주재하면서 “우리 사회가 과거와 싸우면서 많은 것을 허비하고 있기 때문에 희생되는 것은 미래 밖에 없다”라고 걱정했다.
과거와 싸우면 미래는 필연코 희생될 수 밖에 없어
이처럼 박정희 역사가 오늘에까지 살아서 미래를 일구어가는 힘은 그 자체가 신화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박정희 전 대통령의 국가경제개발 신화와 정신, 그리고 민족 웅비의 진정한 가치를 가장 많이 받은 수혜자는 과연 누구일까?
3만 명을 힘들게 했지만 3000만 명을 배부르고 윤택하게 만든 박정희 도약의 혜택은 아마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이명박 현 대통령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21세기 박정희 신화의 표상인 두 명의 전-현직 대통령은 가난과 굶주림의 한계선상에서 허덕였다.
아예 둘 다 지방에서 대학진학도 포기한 채 상업고등학교에 들어가야 했다. 그중에서 한 사람은 형편이 좀 나아 서울의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오직 가난을 잊고 가난을 이기기 위해서 열심히 살았다. 이념도 실용도 배부르고 난 다음의 문제였다.
이것이 60~70년대 당시 우리 삶의 흔적이자 참 모습이었다. 주린 배를 움켜 잡고 토담방 호롱불 아래서 오직 총명한 머리와 미래의 꿈하나 믿고 노력했다. 사법시험은 압축성장 시대에 권력과 돈의 혜택으로 가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었다. 그 후 판사와 변호사를 거치며 당연히 큰돈도 벌었다. 연이어 국회의원과 장관 그리고 위대한 대한민국의 제 16대 대통령직도 충실히 수행했다.
서울의 좋은 대학에 진학한 다른 한 사람도 비록 어렵게는 공부했지만, 박정희 성공신화의 직격탄 덕분으로 경제발전의 선두에 선 기업의 회장과 국회의원, 그리고 서울시장을 거쳤다. 결국에는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망월동 묘지에서 5.18 기념사도 멋지게 했다.
박정희 혜택 표상,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이명박 현 대통령
이것이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삶의 처연한 흔적이자 박정희 신화의 산물이다. 그리고 이것이 역사가 되고 계속 미래가치로 확산되고 있다. 또한 근면-자조-협동의 새마을정신이 창조적 자본주의의 표상이 되고 있다. 반만년 이어져 온 보릿고개의 굶주림에서 우리 모두를 벗어나게 한 신화가 박정희 정신이다.
박정희 이전 한민족은 갈등과 반목, 질시와 비난으로 일관했다. 도저히 무엇 하나라도 이루어 낼 수 없게만 보였던 의지 상실의 백성이었다. 가난에 찌들어 ‘남의 탓, 과거 탓, 주변 탓’에 사로잡힌 닫힌 통념의 인식구조에 젖어 있었다.
그러나 국민총화(國民總和)의 의지 앞에서는 사촌 논 사면 내 배가 먼저 아프고, 무조건 반대부터 하고 보는 비판과 비난의 폐단들이 일시에 타파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반만년 누적되어 온 고답적인 가치관들이 베를린 장벽처럼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결국 한 인간의 의지와 조국과 민족을 위한 충성과 헌신의 산물이었다. 작은 것이 큰 변화를 일으키고, 도무지 움직일 것 같지 않던 거대한 역사의 장벽이 한 위대한 영도자의 의지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다.
우리는 그 때 처음으로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것을 깨우쳤다. 닫히고 못나고 가난한 역사도 국민총화의 의지 앞에서는 약간의 힘만으로도 여지없이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한민족 우리 모두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이처럼 박정희 국가발전의 모델인 경제개발계획과 새마을운동은 신화이기 이전에 차라리 신드롬이자 전염병이었다. 전염되기 쉬운 작은 가치들이 커다란 사회변혁을 주도했다. 적은 변화와 작은 행동들이 커다란 국가발전의 초석을 깔았다. 이런 전염은 적극적인 어느 한 순간에 빠른 속도로 불붙었다. 결국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던 북한경제를 앞서기 시작한 것이다.
매킨지(McKinsey)의 흑백사진
역사적으로 가장 위대한 인물을 꼽는 잣대는 무엇이 가장 타당할까? 관점에 따라 조금은 다르겠지만 전쟁시에는 적대국 또는 평상시에는 이웃 나라 사람들의 존경과 찬사를 받는 인물이 진정으로 위대한 인물이 아닐까?
이런 점에서 통일신라의 장보고와 최치원, 고려의 이제현, 조선의 이황과 이이, 그리고 충무공 이순신 장군 등을 우선적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분들의 공통점은 지금도 중국이나 일본 등에서 자기들 스스로 추모행사를 벌이거나 기념관을 짓고 있으며, 이들이 국가와 민족중흥을 위해 가졌던 정신이나 가치관을 오늘에 되살리려고 우리보다 더 노력하고 있다는 점이다.
21세기 지식기반경제의 글로벌 세계화 시대에 이른바 세계 3대 전략 컨설팅회사로 꼽히는 것은 보스턴컨설팅그룹(BCG), 베인앤컴퍼니(Bain & Company)와 함께 매킨지(McKinsey)이다.
이들 중 매킨지의 아시아-태평양본부 총괄사장인 도미니크 바튼은 21세기 들어 지금까지 계속하여 한국의 ‘정부-기업-소비자-노동계’ 등 4대 경제주체간의 신뢰부족을 지적하여 왔다.
또한 지나친 폐쇄 지향적 의식구조의 문제점을 들면서, 과도한 규제, 수시로 바뀌어 혼선을 자초하는 정부의 정책비전, 그리고 유연성 부족 등으로 잘못하면 한국경제에 치명적인 공백이 올지도 모른다고 경고하고 있다.
그런데 그에게는 특이한 점이 하나 있다. 그는 서울 태평로 자신의 집무실에 1970년 4월 1일 경북 포항의 황량한 모래벌판을 찍은 커다란 흑백사진을 걸어 두고 수시로 바라본다고 한다.
사진 속에 서 있는 세 사람은 다른 아닌 박정희 전 대통령, 박태준 전 포항제철 사장, 김학렬 전 경제부총리다. 한국 경제도약의 상징인 최초 일관제철소인 '포항종합제철소' 착공식 사진이다.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가장 존경하는 세계적 CEO라고 지금도 세계를 돌며 칭송하고 있다. 그 이유로는 미래를 보는 통찰력, 글로벌 마인드, 역사에 대한 책임정신, 국가와 민족을 세계의 자랑거리로 만들고자 한 의지, 선진조국 만들기의 자신감과 ‘근면-자조-협동’의 새마을정신 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난 60~70년대 국민총화로 이룩한 대한민국 경제발전 동력은 90년 이후부터 계속 그 성장엔진의 마력(馬力) 수를 잃어가고 있다. 경제성장의 추동력 지표인 잠재성장률이 계속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는 호조(好調)로 전환되는 급격한 변화의 기회를 말한다. 박정희 이후 우리는 국가발전의 새로운 도약을 기약하는 제2 한강의 기적을 일구는 티핑 포인트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정치는 지역·이념·권력으로 갈려 끊임없는 투쟁과 갈등으로만 점철했다. 그래서 결국 그동안 닦아 놓고 쌓아 놓은 미래가치를 갉아먹는 것에만 중독되고 말았다.
MB, 호조(好調)로 전환되는 급격한 변화의 기회를 포착해야
인류 역사는 항상 인간이 원하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의 직관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이처럼 박정희 시대 이후 한국사회 그 어디에도 말콤 글래드웰(Malcolm Gladwell)가 말한 티핑 포인트의 세 가지 법칙인 △소수의 법칙(the Law of the Few) △고착성 요소(the Stickiness Factor) △상황의 힘(the Power of Context)인 신드롬과 발전의 전염병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건국 60년을 맞은 대한민국은 지금 정치의 신뢰상실 뿐 아니라 경제상황까지도 심각한 '4대 복병'의 후폭풍에 휘청거리고 있다. 바로 적색경고등이 켜져 의무만 있고 아무 책임도 없는 불쌍한 민초들만 계속 힘들어지고 있다.
워낙 원자재 대외의존도가 높고 수출의존도가 세계 최고수준이기 때문에 정부는 폭등하는 물가를 보고도 대책에는 속수무책일 수 밖에 없다. 급등하는 환율문제도 약 1.8% 정도의 지구촌 경제규모를 가지고는 방어나 대처에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래서 수입물가 압박을 가만히 앉아서 견뎌내야 할 형편에 처하고 말았다.
자원민족주의와 에너지국가주의로 고착화된 고유가는 그칠 줄 모르고 계속 오르고 있다. 그래서 유가 폭등은 바로 우리 경제에 주름살로 자리 잡았다. 여기다가 물가를 우려한 금리동결은 경기부양을 위한 경제정책에 제동을 거는 악순환을 초래했다.
그래서 '이명박 정부'는 어이없게도 출범과 동시에 ‘고물가ㆍ고환율ㆍ고유가ㆍ고금리'의 한국경제 4대 '고질병'의 복병을 만난 불행한 정부라고 말할 수 있다. ’7-4-7 MB노믹스‘의 경제 살리기를 국민들에게 약속했지만, 대외 여건이 준비된 경제대통령 구호를 무색케 만들고 있는 것이다.
경제 성장을 위해 갈 길이 바쁘지만 대외경제 여건이 발목이 잡는 형국을 만들고 있다. 그러자 친북좌파 세력들은 바로 정권타도에 이를 빌미로 삼아 악용하면서 정권 무능과 정책 실정으로 연계해 나가고 있다.
◇ 지난해 5월 83세의 나이로 별세한 고 김성은 전 국방장관의 회고록 화보집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에 실린 박정희 전 대통령의 모습.혁명정부 시절의 모습이다. 박 전 대통령 바로 옆이 김장관. ⓒ연합뉴스 |
지금 예측대로 하면, 연말에 가서야 물가 상승세가 꺾일 것이라는 한국은행 전망도 불투명하다. 이에 따라 경기 부양 정책도 방향을 잡지 못한 채 유동적이다. 더구나 추가경정예산 편성도 여당이 반대하여 애초에 제동이 걸리고 말았다.
더구나 한-미 쇠고기 수입협상으로 인한 정부 늑장 대처와 광우병 괴담으로 촉발된 심각한 민심이반은 시급한 정부의 경제회복 정책의지에서 자꾸만 힘을 빼고 있다. 그래서 정부로서도 마땅한 대안을 찾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가운데 해결해야 할 국가적 개혁과제는 산더미처럼 점점 더 커져가고 있다. 정부 능률개혁과 세제개편, 사회서비스 규제철폐, 실용적 교육개혁, 각종 연금개혁, 글로벌기업 육성, 사회부패 척결, 국가경쟁력 및 사회생산성 향상, 한-미 및 한-EU FTA 체결 등은 이제 더 이상 미룰 처지가 아니다. 그리고 한반도 대운하․과학밸트․새만금 사업 등의 핵심 국정과제들도 시급하다.
박정희 역사의 가시밭길
5천년 뱃가죽 붙은 조근목피의 나라, 해마다 반복되는 보릿고개를 넘기지 못해 굶어 죽는 수많은 이 땅의 서글픈 민초(民草)들과 운명을 함께하기 위해 조국근대화의 기치를 들고 군대가 분연히 일어선 것이 5.16혁명이었다.
다행히도 역사는 이 엄청난 결단에 성공을 허락했다. 1인당 국민소득 60달러 미만의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최빈국 ‘박정희 정부’는 우선 먹고 사는 문제에 매달렸다. 자존심도 버렸다. 그러나 미래를 향한 꿈과 희망은 절대 버리지 않았다.
결국 단기간의 압축성장을 통하여 경제개발 성공국가로 우뚝 일어섰다. 그 여파로 우리는 국민소득 2만 달러, 무역 7천억 달러의 세계 10대 교역강국의 위업을 달성했다.
그래서 이제 또 다시 경제발전의 재도약을 기약하며 창조적 가치실용 정부의 ‘이명박 대통령’을 선택한 것이다. 60~70년대 박정희 전 대통령은 자기결단의 혁명과 이 땅의 배고픔 척결의 혁명공약을 완수하기 위해 무조건 국가 경제발전을 앞당겨야 했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은 친북좌파, 그리고 민주의 탈을 쓰고 권력과 자신의 이미지 쟁취에만 몰두했던, 반박정희 이념논쟁을 적극 이용했던 세력들의 저항에 직면했다.
박정희 역사창조 관점에서 대운하 보는 시각 가져야
하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은 그들의 위협에 단호히 맞섰다. 국가발전의 효율성을 위해 한국적 민주주의 토착화의 총화유신(總和維新)을 단행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지금의 한반도 대운하 반대 상황과 똑 같이,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경인 및 경부고속도로 건설, 포항제철 착공, 중화학공업 산업화정책 전환 등 모든 국가통치에 대해 비효율, 독재, 반민주, 경제파탄의 논리로 모조리 반대하고 나섰다.
이런 힘든 국가발전의 노력 와중에 20세기 동아시아 역사의 큰 화두이자 거목은 안타깝게도 자신의 기념관 하나 지을 돈도 남기지 못하고 졸지에 뜻밖의 사고로 비명횡사(非命橫死)하고 말았다. 그것이 바로 1979년 12.26 변고였다.
그보다 5년 전인 1974년 8월 15일, 육영수 여사도 북괴 김일성이 보낸 문세광의 저격탄을 맞고, 그것도 역사적으로 숭고한 제29주년 광복절 기념식 행사장에서 피살되었다.
육영수, 이승복 사건 조작 시도의 교훈
그 이후 이 땅의 친북좌파들은 정권, 언론, 대학, 사회단체에 곳곳에 파고들어 김일성-김정일 조정 하에 끊임없이 육영수 여사의 피살사건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이 엄청난 민족적 비극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자작극으로 조작하려고 끝없는 작전을 시도했다. 그야말로 세작들의 천인공노(天人共怒)할 모략이 국가 전반적으로 획책되었다.
그들은 9살 난 어린 아이의 입을 찢어 죽인 북괴 무장공비에 맞서, 이승복이 외친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투철한 반공민주 이미지와 친북좌파 척결 메시지를 없애기 위해 육영수 여사의 피살사건 조작과 똑같은 공작을 전개했다.
그들은 하이에나같이 지속적으로 문제점을 제기하여 결국 ‘조작’ 여부를 따지는 재판까지 가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역사적 정의는 조작이라는 그들의 주장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 가운데 철없는 어린 학생들의 가치는 많이 왜곡되었고, 친북좌파들은 이를 적극 활용해 박정희와 반공교육은 무조건 나쁘고 실패한 것이라는 상징조작을 심는 데 상당한 성과를 올렸다.
성공한 간첩, 나쁘고 실패한 대통령 만들어
우리가 갖다 바친 돈으로 북방한계선(NLL)을 침략하여 장병 7명에게 치명상을 입힌 ‘제1차 연평도 해상침략’에 이어, 전쟁을 방불케 한 ‘제2차 연평도 해상침략’은 명백한 정전협정 위반이자 묵과할 수 없는 반인도적 무력도발이었다.
하지만 이 땅의 친북좌파들은 북한정권에 대해 어떠한 잘못과 책임도 추궁하지 못했다. 심지어 그들의 눈치만 보는데 급급했다. 침략자 처벌을 요구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북한군이 먼저 공격을 해도 방어하지 못하게 자신의 군대를 나무랐다.
그러면서 그들은 목숨을 걸고 지킨 이 땅의 반공인사, 자유민주의 수호자, 지난 대통령들까지 친미, 군사독재, 부패, 친일, 기득권 수구꼴통 집단으로 끌고 다녔다. 이들은 자유 수호의 표상인 맥아더 동상 파괴까지 시도하면서 이 땅의 자유 민주 의지를 악으로 매도했다.
결국 이를 보다 못한 올곧은 서민들이 먼저 들고 일어났다. 그 대표적 인물로 지난 2002년 6월 ‘제2차 연평도 해상침략’에서 전사한 한상국 중사의 부인 김종선씨가 이런 한심한 비정상적 좌파국가에 살기 싫다며 무작정 이 땅을 떠났다.
그녀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남편을 국가가 오히려 과잉 방어자로 홀대한 반국민적 작태에 노골적으로 분노하고 비관했다. 그는 친북좌파 정부의 외면에 분노하여 2005년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갖은 고생을 감수해야 했다.
다행히도 이번에 ‘이명박 정부’가 ‘제2차 연평도 해상침략’ 전사자 추모식을 정부주관 행사로 격상시키고, 정부가 그동안의 좌파 정부 행위가 잘못되었음을 대신 인정하자 3년 만에 영구 귀국을 결심했다.
곳곳에서 암약하는 친북좌파 전봇대부터 뽑아야
그러나 아직도 수많은 친북좌파 분자들은 정부, 언론, 공공기관, 군, 검찰, 경찰, 법원, 학교, 대학, 연구기관 및 사회 및 환경단체, 심지어 종교단체에까지 곳곳에 침투하여 북한정권의 지령을 수행하고 있다.
그들은 지금도 ‘제2차 연평도 해상침략’에서 침몰되었다가 인양된 해군 고속정 ‘참수리 357정’을 친북좌파 교육장으로 활용하자는 당연한 국민적 여망을 “비용이 많이 들고 창피한 측면도 있다.”며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에 갖다 바친 돈에 비하면 비용이 얼마나 큰지, 또한 침략한 김정일 정권이 창피한지, 아니면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창피한지 도대체 알 수 없는 논리로 반대 여론을 확산하고 있다.
따라서 이명박 정부는 하루빨리 참수리 357정을 전쟁기념관으로 이전해야 한다. 자유 민주와 사회적 평화는 그냥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소중한 목숨으로 지켜진다는 것을 국민과 특히 어린 학생들에게 보여줘야 한다. 김정일 북한정권의 침략을 소중한 우리 장병이 목숨으로 막았다는 숭고한 ‘죽음의 교훈’을 잊지 않도록 정신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연평도 ‘죽음의 교훈’ 잊지 말자
지금도 친북좌파들은 ‘제2차 연평도 해상침략’ 당시 안보를 어떻게 지켜냈는가의 방법론에 대해 “우리가 반성해야 한다.”고 항변하고 있다. 국가안보와 국민목숨을 지키기 위해 생명을 바친, 군인의 책무를 다한 희생 장병의 애국충정을 그들은 계속 모독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그들은 사전 계획된 기습으로 대한민국 영토를 침범한 북한정권 인민군의 경비정을 교전규칙에 따라 죽음으로 즉각 대응한 국군의 정당방위를 ‘반성해야 할 일’로 폄훼했다.
그들은 젊은이의 국가 부름과 소중한 목숨을 바친 애국충정을 모욕적으로 상처를 입히면서도, 북한정권의 독재, 권력세습, 반인권 착취, 정권적 무능과 부도덕에 대해서는 입도 벙끗하지 못하고, 오히려 찬양에만 열을 올리고 있다.
따라서 ‘이명박 정부’는 이런 부적절한 친북좌파의 준동을 대한민국 역사의 이름으로 다시는 어디에도 발을 붙이지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 빨리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그 책임을 추궁해 나가야 한다.
지난번 서울 한복판에서 벌이진 간첩과 빨치산 추모제, 친북좌파 생활지원금 지급, 간첩수사 회피와 대북정보망 파괴, 간첩 신분을 세탁한 민주화보상, 대운하를 국토모독으로 둔갑시킨 행위, 있지도 않는 광우병으로 국민을 미치게 만든 미친 소 괴담선동, 성공한 간첩들이 나쁘고 실패한 대통령으로 만든 상징조작 등의 기막힌 작태를 하루빨리 수사하여 그 근원을 발본색원해야 한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정신적, 이념적 가치를 자유 민주이념의 실용적 가치로 올곧게 바로 세워 나가야 한다. 또한 북한정권의 입장에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비판하고, 항상 생각을 북한 김정일 방식으로 가르치는 전교조의 작태를 엄중히 차단해야 한다.
구소련 괴뢰집단이 일으킨 6.25 남침을 민족분단을 극복하려는 정당한 전쟁으로 호도하고, 이승복 사건과 육영수 여사 저격을 자작극으로 조작하려는 이 엄청난 국가 정체성 훼손을 역사의 이름으로 단호히 처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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