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도청공무원노동조합

경남도청공무원노동조합
  • 오늘접속 : 39
  • 전체접속 : 10,072,324

메인메뉴

본문컨텐츠

나도 한마디Home>참여마당>나도 한마디

권력중독자를 내쳐야한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권력중독 댓글 0건 조회 810회 작성일 08-01-17 08:53

본문

 

 
광고
 
30년동안 재상노릇 군주만 11명 섬긴 풍도, 한국에도 넘쳐
결단력과 실행력으로 서민 가슴을 후련하게 하는 조각돼야


역사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빨리 깨우치지 않거나,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교훈으로 배우는 데 실패한 국가나 민족은 역사가 절대 가지 말라고 저어하는 그 어두운 질곡의 터널을 계속 반복할 수 밖에 없는 한심한 운명에 처하고 만다.

최근 정부조직 개편안 발표와 더불어 제17대 ‘이명박 정부’의 창조적 가치실용 내각을 이끌 국무총리와 대통령비서실장 등 비전내각의 조각(組閣) 작업이 막바지에 다다르며, 자꾸 발표 시점이 늦어지자 관심과 염려가 증폭되고 있다.

희망의 새 정부를 맞아 국민들은 스치는 바람도 민초(民草)들 아픔으로 여기는 조각(組閣)을 진정으로 바라고 있다.
 
그러면서 결단력과 실행력으로 서민들 가슴을 후련하게 해 주는 ‘따뜻한 손길’의 정부가 될 것을 소망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동안 인간 흔적과 경험적 교훈의 탑인 역사의 성찰 메시지에 지금 가만히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북송 말기 명재상이자 유명한 역사가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은 모택동이 대장정 중에도 손을 떼지 못했던 ‘제왕학’의 명저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완성하고 바로 정계에 복귀했다.
 
그리고 그는 바로 당시에 송나라 전역에서 강력하게 추진되고 있던 혁신적인 왕안석의 개혁 신법들을 모조리 폐기했다.

북송이 위기에 처하자 신종은 왕안석을 등용하여 사마광과 정책 이념을 달리하던 대지주 및 대상인의 기득권을 뺏고,
 
 자파 세력인 중소농민 및 상인의 경제적 지위향상을 목적으로 청묘법 등 당시 농민들의 부담을 덜어준다는 명분하에 과감한 혁신적 개혁을 단행했다.

그러나 평소 왕안석의 개혁을 “화물차는 왔다 갔다 하는데 지나고 보면 허허벌판에 먼지만 가득하다.“라며 비판했던 사마광은 철종이 즉위하자 문하시랑에 올라, 그동안 명분에 그친 모든 개혁정책을 모조리 폐기했다.
 
 사마광이 천명한 왕안석 개혁법의 폐기 이유는 신법당들이 파당을 조성해 결단력과 실행력도 없이 말로만 수많은 개혁을 부르짖어 사회분열과 갈등만 조장했다는 것이었다.

사마광은 평소에도 “역사발전은 항상 창조적 결단과 실행으로 이루어진다.”라고 갈파하고 다녔다. 그러면서 그는 B.C.49년 1월 10일 갈리아 전쟁에서 승리한 율리우스 카이사르 명성을 시기하고,
 
책임회피와 갈등만 조장하던 분열의 진원지 로마 원로원을 척결하기 위해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면서 던진 “주사위는 던져졌다(alea jacta est)”와 같은 창조적 결단력을 통치와 국정의 최고 가치로 삼았다.

사마광은 언제나 불확실한 상황 중에서 결단할 수 있는 능력은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왕안석 신법은 근본취지는 좋았으나 ‘청성총결(淸醒總結)’이 부족하여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고 지적했다.

청성(淸醒)이란 정치 지도자는 항상 판단의 가치, 결단의 기준, 관점의 방향을 ‘국민의 배부름’에 두어야 하며, 언제나 자신의 의식을 초심과 원칙이 변질되지 않도록 부패척결과 시대정신, 그리고 민심(輿論)의 향방으로 깨어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총결(總結)이란 끊임없는 혁신으로 더 많은 국민들이 스스로 만족하고, 꿈을 성취하기 위해 먼저 사회통합과 국민총화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이룬 개혁의 성과로 민초(民草)들 가슴을 후련하게 하고, 백성들 스스로 서로의 성과를 자축하게 하여, 결국 자긍심이 넘치는 신나고 기쁜 사회를 이룩하는 것을 의미한다.

풍도 비단천 아래 강물처럼 흐른 백성의 피고름

이러한 개혁의 ‘청성총결(淸醒總結)’에 민감했던 사마광은 당나라가 망하고 이어진 빈번한 배신·음모·반란으로 왕조 전복이 일상화된 중국의 5대10국 시대(907~960)의 혼란기를 안타깝게 살다간 풍도(馮道, 882~954)라는 인물에 주목했다.

기이하게도 풍도는 당(唐)나라 마지막 황제였던 애제(哀帝)가 황소의 잔당을 평정한 후량(後梁)의 건국자 주전충에게 살해되어 5대10국 시대의 혼란이 본격화 된 907년에 25살 나이로 관직에 진출해 죽을 때까지 약 48년 동안 화려한 관료생활을 영위했다.

그는 경천동지할 정도의 오묘한(?) 생명력으로 요즘의 국무총리인 재상 자리에만 무려 27년 동안 눌러 앉아서 엄청난 부와 권력을 거머쥐고 세상을 호령했다.
 
여기서 세상과 역사가 그를 주목하는 이유는 풍도가 재상(총리)으로만 섬긴 왕이 무려 5왕조 8성씨의 11군주였고, 거기에는 거란 등 이민족도 포함되었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왕조 몰락과 이민족 창궐이 빈번한 격변기였다고 하더라도, 도대체 그가 어떤 정치적 속성과 처세술을 가진 인물이었기에 이처럼 끈질기게 권력의 끈을 놓치지 않았을까?
 
 그 해답을 사마광은 《자치통감》에 바람처럼 적어 놓았다.

“나그네가 객방(客房)을 스쳐가는 일과 같았다.”라는 것이 자조(自嘲) 섞인 사마광의 탄식이었다.
 
그러나 만약 풍도가 지금 살아 있다면 “번갈아 섬기면서 스스로 받은 관직을 영광으로 삼고, 집안에서 효도하고 나라에는 충성했다.”라고 강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백성들은 분노하면서 그의 권력중독과 탐욕을 잘 알고 있었다. 풍도의 영광과 효도, 그리고 충성의 비단천 아래에는 배곯은 민초(民草)들의 피고름이 강물처럼 흘렀다는 사실을….

그래서 지금 우리 사회에도 이러한 한국적 풍도가 또 다른 탐욕의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을지 모른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시대정신과 가치, 글로벌 환경과 거버넌스 시스템이 현격하게 ‘삽질에서 클릭’으로 바뀌었는데도,
 
아직도 창조적 통찰력과 가치실용에 대한 관점없이 자기만의 ‘풍도이즘’에 빠져 ‘권력의 객방’에 들락거리고 있는 소인배들이 들끓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권력중독에 빠진 슬픈 영혼들은 아부의 삽질로 새 정부의 의미 있는 가치를 마구 훼손시키며, 자신들은 “이미 옛날에 영혼을 전부 팔았다.”며 항변하고 있다.
 
 따라서 ‘이명박 정부’는 게슴츠레한 변절과 왜곡의 눈빛으로 또 다시 술밥꺼리의 자리보존에 온 정념을 쏟으며, 532만 표의 엄청난 시대정신의 메시지를 깔보는 21세기 한국적 '풍도이즘'을 가장 경계해야 한다.

권력중독에 빠진 21세기 풍도이즘 경계해야

진시황보다 더 강력한 중화사상(中華思想)의 지평을 연 사마천의 《사기》 <진승상세가>에 진평(陳平, ?~B.C.178)이라는 한(漢)나라 재상 얘기가 지금의 상황을 시사적(示唆的)으로 대변해 주고 있다.

진평은 처음 위왕의 신하였고, 그 다음 항우도 그를 의심하자 마지막에 유방에게 도망쳐 온 당시로서는 검증이 덜된 인물이었다.
 
그러나 당시 한나라 실력자였던 위무지는 바로 진평이 굉장한 능력과 가치를 지닌 인물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바로 유방에게 천거했다.

그러자 위무지를 신뢰하고 있던 유방은 그대로 믿고, 바로 항우 밑에서 보던 좋은 벼슬자리를 진평에게 맡겼다.
 
그러자 원래 유방과 함께 고생하면서 술밥꺼리의 좋은 자리만을 기다리며, 지금의 자리에 불만을 품고 있던 기득권 집단들이 벌떼처럼 한꺼번에 들고 일어났다.

“진평은 형수를 겁탈하고, 신의가 부족하여 상황에 따라 자리를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뇌물도 챙긴 부도덕한 인간이다.”는 것이 진평을 공격하는 주된 이유였다.
 
이에 화가 머리끝까지 난 유방은 즉각 진평을 천거한 당시 실력자 위무지를 불러서 질타했다.

그러나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도 위무지는 오히려 당당했다. “폐하께서 지적한 것은 행실이고, 제가 진평을 추천한 이유는 능력이다.”라고 대들었다.
 
 한편 진평도 “형수 겁탈은 반대파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지어난 헛소문이고, 뇌물도 저녁 술값이 둔갑한 것이다.”라고 청원했다.

이에 유방은 모든 것을 수긍했고, 그 후 진평은 유방이 죽을 때까지 충성했다. 그리고 자신을 믿고 중용한 유방을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다시는 과거의 나쁜 소문에 휩싸이는 짓을 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항우를 무너뜨려 중국을 재통일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다했다. 유방이 죽은 후에도 재상을 역임하며 3대 황제까지 정성을 다해 모셨다.
 
 이와 같이 유방은 진평의 행실보다 능력을 더 높이 샀고, 이러한 유방의 결단력과 포용력은 엄청난 효과를 발휘해 한(漢)나라 통일과 융성을 몰고 왔다.

그래서 부국강병을 역사의 정설로 삼은 사마천은 《사기》에
 “재상은 위로 천자를 보좌하여 음과 양을 따르고,
아래로는 만물을 보살피며,
밖으로는 오랑캐들을 대비한다.”는
명재상의 실천명제를 진평의 말을 빌려 훈시적으로 기록했다.

명재상 진평은 국무총리의 자질과 역량을 적무적시(適務鏑矢)의 책임성과 대응성 차원에서 접근했다.
 
그래서 이러한 자신의 직무에 대한 엄정한 책임정신은 지금까지 수없이 국민들 피눈물을 나오게 했던 지난 정책실패의 위정자들을 다시금 생각나게 만들고 있다.

지금도 그들은 여전이 자신들이 저지른 정책실패에 대해 모든 책임과 반성을 회피하고 있다.
 
따라서 지난 시대 반성해야 할 위정자들은 이번 조각(組閣)을 통하여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담긴 엄중한 책임의 경고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인사가 만사'를 공감케 하는 조각(組閣)돼야

1949년 함부르크에서 ‘엄청난 무지이거나 엄청난 위선중 하나’로 논란을 빚었던 영국군 군사법정에서 전 독일군 폰 만슈타인(Erich von Manstein, 1887~1973) 원수는 그의 회고록 《잃어버린 승리(Verlorene Siege)》에서 미래의 지도자를 4종류의 인간형으로 구분했다.

만슈타인은 리더의 자질로
①게으르고 멍청한
②지혜롭고 성실한
③멍청하나 성실한
④ 똑똑하나 게으른 유형으로 파악하면서,
항상 깨어 있으면서도 무적방시(無的放矢)하지 않는,
 ‘현명하고 효율적인’ 마지막
네 번째 유형을 미래의 창조적 지도자로 꼽았다.

이와 관련, 현재 자타가 인정하는 ‘이명박 정부’ 실세인 정두언 의원이 최근 “총리도 겪어봐야 안다.”면서
 
 ‘이명박 정부’ 조각(組閣)에 따른 비전내각 구성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그는 이미 2001년에 《최고의 총리 최악의 총리》라는 책을 써 화재를 모은바 있다.

그는 자신이 모셨던 18명의 총리를 ‘폰 만슈타인’ 기준에 따라 자세하게 평가했다.
 
그러자 국민들은 대통령의 국정을 보좌하고,
민생경제와 시대정신을 잘 보살피며,
대접 받는 강한 외교와 실용적 국가기틀을 다지고,
 
정부 신뢰와 공직기강을 회복하면서,
자신의 기본책무에도 충실할 수 있는
국무총리와 대통령비서실장 등 새 정부 조각(組閣)에 민감한 촉각을 세웠다.

왜냐하면 해방 후 모든 정권들의 말로는 국무총리와 비서실장 등 처음 조각(組閣)에서 그 성패의 단초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지금 상황에서도 지난 5년 전과 10년 전을 생각해 보라. 국무총리 등 조각(組閣) 구성 인물들의 면면을 보면 이 정권이 앞으로 어떻게 끝날 것인지를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번 창조적 가치실용의 ‘이명박 정부’는 초대 국무총리와 대통령비서실장 등 가슴을 설레이게 하는
조각(組閣)을 국민의 여망에 맞게
능력,
열정,
가치,
겸손,
청렴의 잣대로 잘 뽑아야 한다.
 
 좋은 조각(組閣)으로 인해 국민들 입에서 “앞으로 5년도 뻔하다.”라는 서글픈 말이 나오게 않게 만들어야 한다. 국민들 스스로 절망하여 저절로 정부 신뢰의 기틀을 무너뜨리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조각(組閣)을 준비하는 관계자들은 국무총리 등 장차관의 조각(組閣)에 포함된 인물에 따라 향후 국정 5년의 정책과 ‘MB 노믹스’의 성공여부가 좌우된다는 것을 분명히 명심하고 국민이 공감하고 신뢰할 수 있는 참신한 인물들로 조각(組閣)을 구성해야 한다.

특히 그 중에서도 경제 부처 수장들은 산업화 관점의 '삽질’에서 탈피해 미래적 가치를 담보하는 디지털 지식 관점의 새로운 '클릭 인재'를 외부에서 과감히 발탁해 보는 것도 하나의 창조적 경제개혁의 전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바람 소리도 백성들 아픔으로 들리는 총리와 장관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통적 명재상으로 추앙받는 첫 번째 자질은 부국강병(富國强兵)과 역사적 통찰력을 가진 창조성이었다.
 
 그리고 자아청성(自我淸醒)으로 항상 배고픈 민생의 아픔과 가슴에 자신의 눈물을 한없이 쏟을 수 있는 애민애휼의 정신이었다.

그래서 양주팔괴(揚州八怪)의 거장 정판교(鄭板橋)는 백성의 구휼을 몸소 겪으며 눈물로 체득한 명제 ‘난득호도(難得糊塗)’를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고,
 
 이를 실천할 수 인물이 바로 역사와 시대가 요구하는 명제상의 요건이라고 갈파했다.

‘난득호도’는 국가, 민족, 국민, 대통령 앞에서 일상으로 “큰 지혜를 지녔으되 바보인 척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항상 겸손 차원에서 어리석게 행동해야 한다.”는 섬김의 지혜를 말한다.
 
 또한 ‘난득호도(難得糊塗)’는 정치지도자는 절대 시대정신, 역사, 미래, 국민보다 더 똑똑할 수 없는, 절대 변질될 수 없는 역사의 정언(定言)을 명시하고 있다.

중국은 지금 후진타오 주석의 지도력과 원자바오 총리의 검소함과 서민적 행보의 ‘난득호도(難得糊塗)’로 많은 국민들이 지도층에게 자발적인 지지와 성원을 보내고 있다.
 
중국 대륙의 자긍심과 강대국 꿈의 표상이 된 원자바오는 수시로 “백성의 아픔에 다가가라.”는 지난 영웅들의 충고를 스스로 실천하여 많은 국민들의 칭송을 받고 있다.

그는 수년째 운동화 한 켤레로 지방을 시찰하고, 시찰 중에 남루한 시골아낙의 고충을 길가에 서서 듣고 그 즉시 간절하고 시급한 민원을 해결했다.
 
더우기 이런 유사한 사례를 전국적으로 즉각 파악해 모두 해결해 주었다. 이것은 얼마 전 대통령 당선인과의 대화에서 "진행자 제지 뚫고 질문한 '간 큰' 기업인”이라는 조소적 일부 언론 보도를 다시금 생각나게 하는 가슴 찡한 대목이다.

특히 원자바오 총리는 ‘난득호도(難得糊塗)’를 설파한 청나라 정판교의 시(詩) “관저에 누워 대나무 소리를 듣자니,
 
백성들의 아파하는 소리 같네(衙齋臥聽肅肅竹 疑是民間疾苦聲)”를 수시로 읊어 공직자는 항상 인민의 작은 근심과 아픔까지 듣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계속하여 각인시켜 주고 있다

겸손한 '난득호도'의 실용적 인물 기대

지금 한국의 서민들은 지난 10년의 상처를 어루만져줄 정부의 따뜻한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국민들은 더욱 지난 아픔을 치유해 줄 새 정부의 조각(組閣)에 온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최소한 국무총리와 비서실장만이라도 '일지일엽총관정(一枝一葉總關情)'의 "가지하나 이파리 하나까지도 모두가 사랑이다."를 읊조리려고 노력하는 민생경제의 중요성을 아는 인물을 원하고 있다.

어느 국가 어느 정부라도 최소한 국무총리와 대통령비서실장만이라도 항상 정신을 차리고 있으면, 그 정부는 백성의 고통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최소한의 기본자세를 유지할 수 있다.

그래서 국민들은 국무총리, 비서실장을 비롯한 조각(組閣)을 구성한 인물들이 지혜로우나 겸손한 '난득호도'의 창조적 가치실용을 이끌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을파소 총리, 이제현 비서실장의 역사 메시지

1918년 모든 토지와 경제가 일제에 의해 조직적으로 약탈되고, 모든 교육은 노예지 학문으로 전락된 가운데,
 
전 세계 약 5,000만 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간 스페인 독감 펜데믹(Pandemic)이 한반도를 엄습하여 하루아침에 조선 8도는 초토화되고 말았다.

이 때 조선 독립을 가장 염원하던 당시의 선각자들은 희망을 잃지 않으려고 다 함께 세워질 미래의 독립정부 비전내각을 만고도목(萬古都目) 차원에서 조각(組閣)하여 발표했다.

이 때 일인지하 만인지상인 국무총리로는 고구려 고국천태왕 때의 명재상 을파소(乙巴素, ?~203)가 천거되었고,
 
 대통령비서실장에는 역옹패설을 쓴 고려의 지식거목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이 지명되었다.

이 두 영웅의 공통적 품성은 지금까지 모든 역사적 명재상들과 마찬가지로 부국부민(富國富民)의 가치, 정치적 품격, 민생경제와 함께 하는 겸손,
 
 그리고 엄정한 상벌과 책임소재를 명확히 밝힌 것이었다. 또한 을파소와 이제현은 서민들 삶에서 다 함께 배고픔과 아픔을 서로 공유하고 나누었다.

특히 을파소는 고국천태왕이 일반 백성과 함께 농사를 짓고 있던 시골에 직접 내려가 삼고초려(三顧草廬) 끝에 모셔 온 인물이었다.
 
 을파소에게 국상(총리)을 맡기기 위해 임금이 직접 삼고초려를 단행했고, 이에 대한 보답으로 을파소는 세계 최초의 실용복지 정책인 진대법을 기득권의 반대를 무릅쓰고 성사시켰다.

이제현은 원나라의 부당한 처사에서 임금을 고려의 자존심으로 보좌했다.
 
그는 당대 동아시아 정치·행정·외교·지식·교육·문화 방면의 국제적 거물이었으나, 주군(主君)인 임금을 목숨을 걸고 끝까지 의리와 신뢰로 모신 완벽한 비서실장이었다.

그는 충렬왕에서 공민왕까지 다섯 임금을 거듭 모시면서 원나라 왕실, 부원배, 권력중독에 찌든 소인배들의 모함·배신·유배 등을 목숨을 걸고 해결하면서 고려의 왕권을 계속 유지시켜 나갔다.

그리고 무신정권 이전의 귀족집단 기득권을 타파한 고려 원래의 모습을 바탕으로 당시 사회의 전반적 문제로 횡횡하던
변절(變節)·
배신(背信)·
부패(腐敗)·
부정(不正)·
비리(非理)·
부원배(附元輩)·
반역(反逆)·
불신(不信) 등의 심각한 'ㅂ’자 돌림병의 해결책을 적극 모색했다.

또한 그는 모시던 임금 충선왕이 중국의 산골짜기 티베트에 유배가자 끝까지 그 곳을 찾아 목숨을 걸고 임금을 구원해 오해를 풀고 사면을 이루어냈던 충성과 의리의 실용적 비서이자 정치적 동지였다.

그러면서도 을파소와 이제현은 단 한 번도 부정부패에 연류 되거나 오만하지 않았으며, 끝까지 임금과 백성을 함께 묶어 시대정신을 아파했다.
 
또한 고구려 격동기와 악랄한 원의 식민통치하에서도 죽을 때까지 단 한 번도 자신이 유배 가는 일과 모함에 휩싸이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직 임금을 위해 스스로를 삼가고 또 경계했다.

그들이 죽자 임금과 백성 모두가 너무나 슬퍼 길가에서 목 놓아 울었다고 역사는 처연하게 기록하게 있다.
 
그래서 이러한 관점이 바로 지금 21세기 창조적 가치실용 시대에
진정 우리가 희망하는 ‘먼저 변하며 알뜰하고
유능한 정부’를 만드는 미래지향적 올곧은 조각(組閣)의 출발점이 아니겠는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하단카피라이터

경상남도청공무원노동조합 / 주소 (51154) 경남 창원시 의창구 중앙대로 300 (사림동 1) / 대표전화 055.211.2580~3 / 팩스 055.211.2589 / 메일 ako2582@korea.kr
Copyright(c)경상남도청공무원노동조합.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