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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누구인가 댓글 0건 조회 895회 작성일 07-12-20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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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그는 누구인가
고학생·샐러리맨 신화, 청와대 주인되다

목장 노동자의 아들… ‘승부사’ 기질 다분

35세 CEO·국회의원·서울시장 거쳐 大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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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19일은 이명박 당선자에게 남다르다.
생일(양력)에 결혼 기념일, 대통령 당선까지 같은 날이니 12월19일은 그의 인생에서 ‘트리플 크라운’인 셈이다.
목장 노동자의 아들에서 35세에 현대건설 최고경영자(CEO)에 오른 CEO출신 정치인으로는 처음으로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이 당선자는 국회의원과 지방자치단체장(서울시장)을 거쳐 행정수반에 오르는 ‘그랜드 슬램’까지 달성했다.
거칠 것 없는 삶으로 위기마다 정면 승부를 펼친 이명박 당선자의 오늘을 만든 힘은 긍정의 힘을 바탕으로 하는 희망과 도전, 어머니, 현대라는 단어를 빼곤 설명이 힘들다.
●유소년·청년기
이 당선자는 일제 치하였던 1941년 일본 오사카(大阪)에서 목부였던 아버지 이충우(1981년 작고)씨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어머니 채태원(1964년 작고)씨 사이에서 태어난 4남 3녀(귀선, 상은, 상득, 귀애, 명박, 귀분, 상필)중 다섯째이다.
족보에 올라 있는 이 당선자의 이름은 다른 형제들과 같이 ‘상’(相)자 돌림을 딴 ‘상경’(相京). 그러나 어머니가 치마폭에 보름달을 안는 꿈을 꿨다고 해서 ‘명박’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한국 현대사의 굴곡만큼이나 이 당선자의 유·소년기와 청년기는 질곡의 연속이었다.
“굴 껍데기처럼 우리 대가족에게 들러붙은 가난은 내가 스무 살이 넘어서도 떨어질 줄을 몰랐다”고 유년기를 회고한 그는 “모든 것을 어머니에게서 배웠다”고 스스럼없이 말한다.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초등학생 때부터 김밥과 풀빵, 뻥튀기, 과일, 생선, 옷감 등을 팔며 고학으로 포항 동지상고 야간부를 졸업했다.
1959년 12월 부모, 동생과 함께 상경한 서울 생활도 고달픔은 그치지 않았다. 이태원 판자촌에 단칸방을 얻어 놓고 시장에서 노점을 해야 했고 잠자리마저 불편했던 그는 달동네 합숙소에서 일당노동자가 고작이었다.
그런 속에도 몸은 현장에 있었지만 마음과 발길은 동숭동이나 안암동, 신촌 등 대학가로 향했다.
생존이 유일한 과제였던 그 때 “대학시험이라도 한번 쳐보자. 합격만 하면 학교에 못 다니더라도 중퇴가 된다”는 당돌함으로 대입을 준비, 주경야독 끝에 61년 고려대 상과대학에 합격한다.
환경미화원 생활을 하며 대학을 다니던 그는 고대 상과대학 학생회장 때 ‘한·일 국교정상화’를 반대하는 6·3 시위를 주도, 대법원에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6개월 복역했다.
이 당선자에게 이 시기는 “동지상고 재학시절 여학교 정문 앞에서 뻥튀기 장사를 하는 것이 부끄러워 밀짚모자를 눌러쓰고 있는 아들의 모습을 본 어머니가 ‘뭐가 부끄럽느냐. 네가 구걸을 하느냐, 남을 속이느냐. 당당하게 살아라’는 가르침을 주었다”고 자서전에서 회고할 만큼 어머니의 가르침은 힘인 동시에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터널이었다.
●‘현대’와 인연
이 당선자의 일생에서 어머니만큼이나 큰 인연은 ‘왕회장’인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을 만난 것이다. 굴껍데기 같이 붙어 있던 가난의 굴레를 떨치고 본격적인 도약을 하는 시기다.
운동권 학생이라는 이유로 취직을 할 수 없었던 그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고 1965년 현대건설에 입사한다.
정부가 그를 국영기업체나 해외유학으로 회유하려 하자 “한 젊은이가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고자 하는데, 국가가 그 길을 막는다면 국가는 젊은이에게 영원한 빚을 지는 것입니다”라고 말한 것이나 현대건설 면접에서 “건설이 뭐라고 생각하나”고 묻는 정주영 회장의 질문에 “건설은 창조입니다”라고 했던 대답은 아직도 회자된다.
현대건설에 입사한 그는 입사 5년 만에 이사로 승진하고 12년 만인 77년 35세 때 최고경영자(CEO)에 오르며 ‘샐러리맨의 신화’가 됐다.
이 당선자는 이 시기 “싱가포르 리콴유 총리, 말레이시아 마하티르 총리, 중국 장쩌민 주석, 구(舊)소련의 고르바초프 서기장 등과 교류를 통해 한국의 대표적인 CEO로서 국제적인 감각을 폭넓게 익혔다”고 말한다. 또 세계에서 세번째로 긴 말레이시아 페낭대교 연륙교를 건설하고 이라크 화력발전소를 짓는 등 열사의 나라에서 동토의 시베리아까지 지구촌 방방곡곡을 누비며 세계가 인정하는 최고경영자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목숨을 걸고 현장 폭도로부터 끝까지 금고를 지켰던 태국 파타니나라티왓 고속도로 사건과 국보위를 상대로 정주영 회장을 대신해 ‘피눈물’로 현대자동차를 지켰던 일은 집념과 투지, 위기에서 더 빛을 발하는 도전의식을 보여주는 사례로 꼽힌다.
●멈출 줄 모르는 도전
이 당선자는 1992년 27년간의 현대그룹 생활을 마치고 14대 총선에서 민자당 전국구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한다.
96년 15대 총선에서 ‘정치 1번지’인 서울 종로에서 4선인 이종찬, 청문회 스타인 노무현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그러나 영광 뒤 ‘시련’도 있었다. 선거법 위반으로 그는 1998년 중도 사퇴했다. 시련은 그를 단련시켰고 2002년 7월 민선 3기 서울시장으로서 ‘컴백’한다.
서울시장에 당선된 그는 기업에서 배운 경영마인드를 공공행정에 도입한 새로운 경영 행정을 대도시 서울에 확립하는데 혼신을 다해 누구도 불가능하다고 했던 ‘청계천복원사업’ ‘대중 교통체계 개편’을 차질없이 성공시켰다. 또 공공정책을 세계에 처음 수출하는 성과도 거뒀다.
도심을 걷기 편한 산책로로 만들고 차로 가득했던 서울광장을 시민을 위한 광장으로 변화시켰다.
대규모 개발계획이 세워져 있던 뚝섬을 서울숲으로 만들었으며 예산을 매년 8000억원씩 절감해 서울시 재정의 고질이었던 지하철 건설 부채를 절반으로 줄였다. 서울시 전자정부는 뉴욕, 도쿄 등 세계적인 대도시를 제치고 2년 연속 세계 1위를 차지했다.
‘이명박식 시정’은 ‘공무원도 춤추게 만든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서울시를 역동적인 행정 서비스 조직으로 탈바꿈시켰다.
이명박의 리더십은 타임스, 비즈니스위크, 파이낸셜타임스 등 국제 언론의 주목을 받았으며 특히 서울 도심에 생명의 물길을 연 청계천 복원사업은 삼성경제연구소가 선정한 올해 히트상품, 베니스비엔날레 ‘최고 시행자상’ 수상 등 국내·외에서 최고의 평가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외국 관광객들이 빼놓지 않고 찾는 명물이 됐다. 특히 타임지는 올 10월 이명박 후보를 ‘올해의 환경영웅’으로 선정, 서울시장으로서 그의 업적이 국제적으로도 인정받는 계기를 제공했다.
시울시정의 높은 만족도는 그를 가장 경쟁력있는 대선 후보로 ‘길’을 터주었으며 2007년 12월19일 제17대 대통령이라는 ‘월계관’을 국민의 지지로 쓰게 됐다.
이 당선자의 멈출 줄 모르는 도전은 ‘경제 되살리기’와 ‘국민 통합’이라는 소명에 닿아 있고 국민들은 지지와 비판을 동시에 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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