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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동할머니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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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동맨 댓글 0건 조회 885회 작성일 07-09-04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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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서울역 우동할머니

평생 서울역 앞에서 우동을 팔아온 김복순(83) 할머니가 지난 10일 세상을 떠나자
그녀의 삶에 대해 이야기들은 많은 사람들이 감격하며
그의 죽음을 기리고 있습니다.  

김 할머니는 서울역 앞 2평짜리 가게에서 우동과 어묵을 팔며 모은
전 재산(장위동에 소재한 2억7000만원 상당의 빌라)을 경희대학에 기부했고
또 "늙은이의 몸이지만 학생들의 배움에 조금이라도 유익하게 사용된다면 고맙겠다"며
경희대 의과대학에 연구용으로 자신의 시신을 기증했습니다.

김 할머니는 9남매의 장녀로 경남 거제도에서 태어났지만
"입 하나라도 줄이겠다"며 어린 나이에 상경해 서울역 앞에서 우동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1970년대 고생 끝에 식당을 연 뒤 고향인 거제도 창호초등학교에
책상과 걸상, 악기 등을 여러 차례 기증했고
또 해마다 겨울이면 어려운 이웃에게 내복을 사서 나눠줬습니다.

김 할머니는 1998년에 그녀가 살고 있던 장위동 집을 기증하기로 경희대 쪽과 약속했고
2002년에는 "돈도 필요 없다"며 가지고 있던 현금 전부인 8,800만원을
경희대에 건너면서 "이제는 늙은 몸일망정 학생들 공부에 도움이 된다면 좋겠다"며
시신 기증도 약속했습니다.

김 할머니는 젊었을 때 남편과 사별한 후,
오갈 데 없는 고아나 어려운 집안의 아이들을 데려와 키워냈습니다.
그래서 할머니의 임종을 지켜본 세 딸은 모두 성이 다릅니다.
할머니를 '호랑이 어머니'라고 말하는 막내딸 김미진(26)씨는
"가족들에게는 꽁보리밥을 먹이면서도 이웃에 쌀을 사서 돌려,
어린 마음에 투정이라도 할라치면 '너희들은 내가 주는 사랑이 있으니 괜찮다'며
엄하게 타이르곤 하셨다"며
"잘못한 일이 있으면 회초리를 드는 일도 많았지만
항상 먼저 눈물을 보이시는 어머니였다"고 말했습니다.

입양한 세 딸은 벌써 장성하여 출가했지만 할머니의 뜻에 따라
"우리를 이만큼 키워 주신 것만도 고마운데 무엇을 더 바라겠느냐"며
김 할머니의 재산의 상속을 포기한다는 각서를 작성했습니다.

택시 운전을 하는 둘째 사위 하민호(39)씨와 둘째딸 심명희(38)씨 부부도
김 할머니처럼 향후 경희대에 전 재산을 기부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면서
"지금은 비록 어렵게 살아가고 있지만 장모님의 모습을 보며
행복한 삶에 대해 배우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김 할머니와 함께 살아왔던 막내딸 미진(26)씨는 할머니가 세상을 뜬 뒤
빌라 기증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사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경희대학교는 김 할머니가 기부한 재산으로 '김복순 장학재단'을 만들어
어려운 환경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을 지원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김 할머니와 같은 분들의 훈훈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깨닫는 것은
감동이 넘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은 우리가 가진 소유가 아니라
남을 사랑하는 따뜻한 마음이며
그것은 적은 일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정 충영 경북대 명예교수님, '남산 편지' 중에서
 

2.한 마디 말의 힘                       
다음 글은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인 박동규교수의 글을 줄인 것입니다.

내가 초등학교 육학년 때 육이오 전쟁이 났다.

아버지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어머니 말씀 잘 듣
 
고 집 지키고 있어" 하시고는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가셨다.
 
그 당시 내 여동생은 다섯 살이었고, 남동생은 젖먹
 
이였다.

인민군 치하에서 한 달이 넘게 고생하며 살아도 국군은 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견디다 못해서 아버지를 따라 남쪽으로 가자고 하셨다.
일주일 걸려 겨우 걸어서 닿은 곳이 평택 옆, 어느 바닷가 조그마한 마을이었다.
우리는 어느 집 흙담 옆 골목길에 가마니 두 장을 주워 펴놓고 잤다.
먹을 것이 없었던 우리는 개천에 가서 작은 새우를 잡아
담장에 넝쿨을 뻗은 호박잎을 따서 죽처럼 끓여서 먹었다.

삼일 째 되는 날, 담장 안집 여주인이 나와서 우리가 호박잎을 너무 따서
호박이 열리지 않는다고 다른데 가서 자라고 하였다.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남쪽으로 내려갈 수 없으니 다시 서울로 돌아가서
아버지를 기다리자고 하셨다.

다음날 새벽 어머니는 소중하게 아끼던 재봉틀을 들고 나가서 쌀로 바꾸어 오셨다.
쌀자루에는 끈을 매어서 나에게 지우시고,
어머니는 어린 동생과 보따리를 들고 서울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평택에서 수원으로 오는 산길로 접어들어 한참을 가고 있을 때
젊은 청년이 "무겁지. 내가 좀 져 줄게" 라고 하였다.
쌀자루를 짊어진 청년의 발길이 빨랐다.
한참을 가다가 갈라지는 길이 나왔다.

나는 어머니를 놓칠까봐 "아저씨, 여기 내려주세요. 어머니를 기다려야 해요"하였다.
그러나 청년은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그냥 따라와"하고는 가 버렸다.
청년을 따라 가면 어머니를 잃을 것 같고 그냥 앉아 있으면 쌀을 잃을 것 같았다.
당황해서 큰소리로 몇 번이나 "아저씨!" 하고 불렀지만 청년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그냥 주저앉아 있었다.

한 시간쯤 지났을 즈음 어머니가 동생들을 데리고 오셨다.
길가에 울고 있는 나를 보시더니 "쌀자루는 어디 갔니?"하고 물으셨다.
나는 청년이 져 준다면서 쌀자루를 지고 저 길로 갔는데,
어머니를 놓칠까봐 그냥 앉아 있었다고 했다.
순간 어머니는 한참 있더니 갑자기 내 머리를 껴안고
"내 아들이 영리하고 똑똑해서 에미를 잃지 않았네" 라고 하시며 우셨다.

그 날 밤, 우리는 조금 더 걸어가 어느 농가 마루에서 자게 되었다.
어머니는 어디에 가셔서 새끼 손가락만한 삶은 고구마 두 개를 얻어 오셔서
내 입에 넣어주시고는 "내 아들이 영리하고 똑똑해서 아버지를 볼 낯이 있지" 하시면서 또 우셨다.

그런 위기 상황에 생명줄 같았던 쌀을 바보같이 다 잃고 누워 있는 나를
영리하고 똑똑한 아들이라고 칭찬해 주시다니...  
그 후, 어머니에게 영리하고 똑똑한 아이가 되는 것이 내 유일한 소원이 되었다.
내가 공부를 하게 된 것도 결국은 어머니에게 기쁨을 드리고자 하는
소박한 욕망이 그 토양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어머니의 한마디 격려가 얼마나 큰 힘을 갖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격려하고 산다면 우리의 삶은 지금과 전혀 다른,
사랑이 넘치는 사회가 될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내가 무심코 던진 한 마다 말이

남을 격려하지 못하고 해치지나 않았나 반성하게 됩니다.

  
[이 게시물은 전체관리자님에 의해 2007-10-10 06:59:16 나도한마디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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