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이훈범] 조선 태종 임금이 사냥을 나갔다. 살찐 노루를 발견하고 활시위를 당기는데 말이 거꾸러지는 바람에 그만 떨어지고 말았다.
다치지는 않았지만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좌우를 돌아보며 태종이 말했다.
“사관(史官)이 알지 못하게 하라.” 하지만 사관은 친절하게도 태종의 이 말까지 기록해 후세에 남겼다.
이처럼 조선의 임금이 가는 곳엔 늘 사관이 따랐다.
왕의 사적 공간이기도 한 편전(便殿)도 예외가 아니었다. 왕과 신하가 독대하는 자리 역시 사관이 붓을 들고 끼어 앉았다. 권력자가 얼마나 거북했겠나.
사관을 쫓으려는 시도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조선왕조는 끝내 공개정치를 지향했기에 눈엣가시 같은 사관의 존재를 감내했으며 결국 그 덕을 톡톡히 봤다.
밀실정치의 필연적 귀결인 권력 부패를 막아 500년 왕업을 이을 수 있었던 거다. 돌아보건대 사관은 역사의 기록자였을 뿐 아니라 권력의 감시장치였던 것이다.
왕조시대에도 엄두를 못 냈던 밀실·막후정치가 대명천지 민주사회에서 모의되고 강행되고 있는 게 어이없고 가소롭다.
목표는 오늘날 사관 노릇을 대신하는 기자들을 내치는 것이다. 애먼 기자실을 통폐합해 닭장을 만들고, 공무원과 기자들의 접촉을 원천 봉쇄한다.
숨김없이 밝히겠다던 개방형 브리핑은 정부의 잘못과 실수에 오리발을 내밀거나 맹탕 정책들을 선전하는 자리가 된 지 오래다. 모든 기자의 관리를 한곳에서 하겠다는 것도 냄새가 난다.
비판적 기사를 쓴 기자에 출입 제한 같은 효율적 제재 수단을 갖겠다는 심보 말고 달리 보이지 않는다.
나중에 사실로 밝혀지더라도 일단 오보라고 우기면 그만이다. 어디 한두 번 겪는 일인가. 하긴 그처럼 낯이 두꺼우니 기자들의 눈·귀를 가리고 입을 막는 조치에 ‘취재지원 선진화’라는 이름을 갖다 붙일 수도 있겠다.
권력과 언론의 갈등은 불가피한 일이다. 권력은 내세우려고만 하고 언론은 감춘 걸 들추려고만 하니 사이 좋기가 쉽지 않다.
임금은 잡은 노루를 자랑하고 싶고, 사관은 낙마 사실에 관심을 갖는 것과 같다. 특히 구린 구석, 빈틈 많은 정부일수록 언론 비판에 적대적이다. 언론 행태에 흑보기가 돼 언론 재갈 물리기를 끊임없이 시도한다.
조선시대에도 연산군 시절 사관들이 큰 위기를 맞는다. 연산군은 말했다. “임금이 두려워하는 것은 사서(史書)뿐이다.
『춘추(春秋)』에 이르기를, 어버이를 위한 자는 (잘못을) 감추거나 숨긴다 했으니 사관은 시정(時政)만 기록해야지 임금의 일을 기록하는 것은 마땅치 못하다. (…) 임금의 행사는 역사에 구애될 수 없다.”
무소불위의 연산군이지만 역사에 무도한 폭군으로 기록되긴 두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역사가 두렵다면 스스로 행실을 살펴 바른 정사에 애썼어야지 사관의 붓을 꺾는다고 하늘이 가려질 일이 아니었다.
순리를 거스르는 일은 오히려 몰락을 앞당길 뿐이다. 사관에게 임금 일을 못 쓰게 한 뒤 보름 만에 중종반정이 일어나고 연산군은 폐위되고 만다.
그 뒤 사관들에 의해 쓰인 『연산군 일기』는 연산도 억울할 게 분명할 만큼 악평 일변도다. 꺾였던 붓 자루를 이어 쓰는 평이 좋을 리 없다.
총서 부분을 조금만 보자. “(…) 어릴 때 학문을 좋아하지 않아 공부를 권하는 이가 있으면 못마땅히 여겼다.
즉위해서는 궁 안에서 행실이 좋지 못했으나 (…) 만년에는 주색에 빠지고 도리에 어긋나며 포학한 정치를 해 대신·대간·시종을 많이 죽였다. 심지어 (…).”
속 모르게 언론에 심사가 뒤틀린 권력자가 밀어붙이는 언론통제책은 또 후세가 어떻게 기록할지 궁금하다.
재능 많아 연산의 총애를 받고 “성상의 하교가 지당하십니다”라고 조아렸던 승지 강혼 같은 이는 나중에 반정에 참여해 공신 반열에 오른다.
훌륭한 외국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거나 수학하고 돌아와 권력자 밑에서 “지당하십니다”를 외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평가는 어떨지, 권력의 끈이 떨어진 뒤 그들의 행동은 어떨지도 두고 볼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