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상(虛像)의 인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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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인생 댓글 0건 조회 858회 작성일 07-08-10 09:37본문
< 허상(虛像)의 인생 >
원래(혼돈상태)의 만물은 동체자연(同體自然)이다.
그러나 나(我)가 생기고 나에서 나온 의식의 지배를 받으면서
피아(彼我), 유ㆍ무식, 빈부, 미추(美醜) 등의 구분이 생겼다.
< 소꿉장난의 세계 >
소꿉놀이 하는 아이들을 보자.
흙을 밥, 나뭇잎을 반찬, 빈 사금파리 조각을 국그릇이라 한다.
차린 음식을 맛있게 먹고 숭늉까지 마시는 시늉을 한다.
나름대로 위계질서가 있고, 분업과 협력도 잘 이루어진다.
그러나 어른의 눈으로 보면 어떠한가?
그들의 밥과 반찬은 실상이 아니라 흙과 나뭇잎일 뿐이다.
중생세계도 자연세계에서 보면 아이들 소꿉장난 세계와 같다.
너-나-우리, 권세와 부귀영화, 유무식과 미추(美醜) 등도
소꿉장난 밥상처럼 의식이 만든 허상이다.
따라서 입력된 인식기준만 바꾸면 천지가 지천(地天)으로 바뀐다.
유ㆍ무식과 미추의 개념도 그러하다,
< 실상(實相) 찾기 >
그러나 실상은 바뀌지 않는다.
진리탐구와 도(道)수행은 결국 실상을 찾자는 것이다.
소꿉장난의 세계에서 자연 본래의 세계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자연의 공간은 무궁하고, 시간은 무시무종(無始無終) 무한하다.
-사는 시간은 살지 않는 시간에 비하면 아침이슬 이다.
-아는 것은 모르는 것에 비하면 백사장의 모래알 하나도 안 된다.
-재물은 탐해보았자 에서의 팥죽 한 그릇만도 못하다.
현실은 어떠한가?
자기 잘난 박ㆍ박사는 많아도 이를 깨닫는 현자(賢者)는 드물다.
교육이 본연의 기능을 못 하기 때문이다.
선효후문(先孝後文), 가르침(敎ㆍ斅)의 함의도 모르기 때문이다.
먼저 실상을 가르친 다음 삶의 지(智)를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정와불가 이어어해(井蛙不可以語於海)
우물 안 개구리(井底蛙)에 바다이야기는 마이동풍(馬耳東風)이다.
들을 귀가 없는 중생에 대한 진리 논의 또한 그와 대동소이 하다.
오직 심령이 가난한 구도자(求道者)만이 경청한다.
< 자연인(自然人) >
자연과 동체(同體)인 실상을 자연인이라 한다.
자연인은 의식이 만든 허상의 인연과 부귀영화를 극복한 분이다.
제1, 상대방 입장에서 보고 생각하고 행동한다.
서(恕 = 같을 如 + 마음 心 : 상대방과 같은 마음)의 세계이다.
제2, 제삼자 관점에서 보고 생각하고 행동한다.
객관적 관조(觀照)의 세계이다.
제3, 자연의 세계에 동화(同化)되어 버린다.
제삼자의 입장까지도 없는 영접(迎接)의 세계이다.
정견(正見), 그때 비로소 있는 그대로의 실상이 보인다.
천상천하유아독존, 무명의 들꽃까지도 동일하게 존귀한 존재이다.
예배와 찬송이 절로 나온다.
서로 아끼고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그곳이 바로 극락(極樂)의 지상낙원(paradise)이다.
천국은 누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찾는 것이다.
유ㆍ불ㆍ성경(儒-佛-聖經)은 모두 그 길(道) 안내서이다.
일체유심조, 천국과 지옥이 모두 내 마음 속에 있는 것이다.
[이 게시물은 전체관리자님에 의해 2007-10-10 06:58:52 나도한마디에서 복사 됨]
원래(혼돈상태)의 만물은 동체자연(同體自然)이다.
그러나 나(我)가 생기고 나에서 나온 의식의 지배를 받으면서
피아(彼我), 유ㆍ무식, 빈부, 미추(美醜) 등의 구분이 생겼다.
< 소꿉장난의 세계 >
소꿉놀이 하는 아이들을 보자.
흙을 밥, 나뭇잎을 반찬, 빈 사금파리 조각을 국그릇이라 한다.
차린 음식을 맛있게 먹고 숭늉까지 마시는 시늉을 한다.
나름대로 위계질서가 있고, 분업과 협력도 잘 이루어진다.
그러나 어른의 눈으로 보면 어떠한가?
그들의 밥과 반찬은 실상이 아니라 흙과 나뭇잎일 뿐이다.
중생세계도 자연세계에서 보면 아이들 소꿉장난 세계와 같다.
너-나-우리, 권세와 부귀영화, 유무식과 미추(美醜) 등도
소꿉장난 밥상처럼 의식이 만든 허상이다.
따라서 입력된 인식기준만 바꾸면 천지가 지천(地天)으로 바뀐다.
유ㆍ무식과 미추의 개념도 그러하다,
< 실상(實相) 찾기 >
그러나 실상은 바뀌지 않는다.
진리탐구와 도(道)수행은 결국 실상을 찾자는 것이다.
소꿉장난의 세계에서 자연 본래의 세계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자연의 공간은 무궁하고, 시간은 무시무종(無始無終) 무한하다.
-사는 시간은 살지 않는 시간에 비하면 아침이슬 이다.
-아는 것은 모르는 것에 비하면 백사장의 모래알 하나도 안 된다.
-재물은 탐해보았자 에서의 팥죽 한 그릇만도 못하다.
현실은 어떠한가?
자기 잘난 박ㆍ박사는 많아도 이를 깨닫는 현자(賢者)는 드물다.
교육이 본연의 기능을 못 하기 때문이다.
선효후문(先孝後文), 가르침(敎ㆍ斅)의 함의도 모르기 때문이다.
먼저 실상을 가르친 다음 삶의 지(智)를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정와불가 이어어해(井蛙不可以語於海)
우물 안 개구리(井底蛙)에 바다이야기는 마이동풍(馬耳東風)이다.
들을 귀가 없는 중생에 대한 진리 논의 또한 그와 대동소이 하다.
오직 심령이 가난한 구도자(求道者)만이 경청한다.
< 자연인(自然人) >
자연과 동체(同體)인 실상을 자연인이라 한다.
자연인은 의식이 만든 허상의 인연과 부귀영화를 극복한 분이다.
제1, 상대방 입장에서 보고 생각하고 행동한다.
서(恕 = 같을 如 + 마음 心 : 상대방과 같은 마음)의 세계이다.
제2, 제삼자 관점에서 보고 생각하고 행동한다.
객관적 관조(觀照)의 세계이다.
제3, 자연의 세계에 동화(同化)되어 버린다.
제삼자의 입장까지도 없는 영접(迎接)의 세계이다.
정견(正見), 그때 비로소 있는 그대로의 실상이 보인다.
천상천하유아독존, 무명의 들꽃까지도 동일하게 존귀한 존재이다.
예배와 찬송이 절로 나온다.
서로 아끼고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그곳이 바로 극락(極樂)의 지상낙원(paradise)이다.
천국은 누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찾는 것이다.
유ㆍ불ㆍ성경(儒-佛-聖經)은 모두 그 길(道) 안내서이다.
일체유심조, 천국과 지옥이 모두 내 마음 속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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