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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 용성스님 화과원 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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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고혜정 댓글 0건 조회 901회 작성일 07-06-12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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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 백운산 용성스님 화과원 복원
독립운동 전진기지 선농불교 정립
[2007-06-07 오후 9:25:00]
 
 
 함양 백운산 용성스님 화과원 복원

독립운동 전진기지 선농불교 정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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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사스님의 얘기를 하시다 말고 잠시 감회에 젖은스님
함양군 백전면 백운리 백운산에는 독립운동가이자 대각교를 창건한 용성스님의 선방, 법당, 도요지 터 등 독립운동의 전진기지 역할을 했던 요사채 17동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그 중 용성스님이 기거하시던 임법당 한 동과 부속건물 한 동의 복원 작업이 한창이다. 용성스님의 유지를 받들고 문화재(제229호)복원 및 발굴 작업을 맡은 적멸보궁 화과원(華果院) 원장 혜원스님을 만났다.

 

“화과원은 일제가 곡식을 수탈하자 민족의 양식 대용으로 감나무, 밤나무, 배나무 등 유실수 수 만여 주를 심었으며 수행하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참선하는 선농불교(禪農佛敎)의 핵심 실천도량이었습니다” 여기서 만든 자금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했다고 한다.

 

이곳은 지리적으로 화과원→군산항→중국 용정과 상해를

잇는 독립운동 네트워크의 허브역할을 했던 곳이다


백운산에는 70여년 전 어두운 새벽녘 용성스님을 비롯한 독립투사들의 거룩하고 분주한 발자국소리가 그대로 들려오는 듯하다. 화과원으로 올라가는 숲길 옆으로 용소폭포가 흰 비단처럼 물을 뿌리며 나뭇잎보다 더 푸르고 깊은 빛깔로 소를 만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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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곡을 타고 올라가는 모노레일
필자의 일행은 한 줄의 위태로운 모노레일에 의지해 1200여고지에 달하는 백운산 정상 부근 용성스님이 기거하던 절터로 향했다. ‘덜컹덜컹’ 속가의 중생들이 탄 미니기차는 혜원스님의 안내로 산들바람 부는 시원하고 고요한 숲속을 가르며 일제시대 독립운동의 현장으로 느리면서도 가파르게 빠져들고 있었다.


한참을 올랐을까. 산목련이 핀 나뭇가지 사이로 용성스님이 막사발 도요지로 조성한 용유대 터가 나타났다. “여기서 구워낸 막사발을 일본사람들에게 팔아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했어요” 혜원스님의 설명이 이어졌다. “용이 노는 자리여서 용유대라 부르죠. 예로부터 요새는 협곡을 끼고 험난하면서도 교통의 요지여야 했습니다” 실제로 백운산을 넘어가면 서상, 장수 등으로 이어지는데 이는 기동력과 피신처로서의 기능을 보장해주는 천혜의 요새임을 말해준다. “일본 형사 2~3명이 항상 출근하다시피 하여 용성스님과 독립운동가들을 감시하였습니다.


협곡을 낀 곳곳이 천혜의 요새, 서상, 장수로 이어지는

독립운동가들의 발자국 흔적인가 참 다래 길게 손 내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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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유대' 최초 도요지 스님이 심은 감나무만 외롭게 서있다.
계곡과 산 곳곳에 요사채 17동이 흩어져 있는 것은 일제의 감시를 피하고 몸을 숨기기 위함이었죠” 막사발 도요지 부근에 도자기 파편들 사이로는 이제 취나물을 비롯한 산나물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참다래, 기자, 산목련, 대나무, 밤나무 사이를 구불구불 모노레일은  한참 후 백운산 9부 능선에 자리한 봉류대 복원공사현장에 도착했다.


용성스님의 화과원은 해방 후 6ㆍ25전란 당시 우리의 군경에 의해 공비 토벌작전 때 완전히 불타버렸다. 폐허가 되어버린 절터엔 선인들의 흔적이 남은 돌덩이들 위로 야생화와 잡초들이 무성했었는데 이제는 제법 법당의 모습이 드러나고 있었다. 그러나 용성스님의 발자취를 온전히 재현하기에는 아직 걸음마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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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사스님의 말씀 이제야 느끼게 되었다며 기쁘하시는 혜원스님
이번 용성스님 문화재 복원사업의 의의는 매우 크다. 우선 국가에서 스님들에 대한 예우로는 최초다. 서산대사 사명대사 이후로 민족을 위해 일한 큰 스님들의 문화재 복원은, 더구나 폐허상태에서의 복원은 사상 처음이다. 어떻게 이렇게 까지 복원을 했고, 사업을 진행해 왔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이에 대해 혜원스님은 “은사스님이신 이동헌 스님(용성스님의 심복제자)께서 늘 ‘자네가 화과원을 짓게’, 라고 말씀하셨지만 처음에는 스님이란 수행과 공부만 하는 게 옳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용성스님이 정치ㆍ사회에 참여한 권승 인줄로만 알았죠”라고 말했다.

그 옛날 궁구했던 참선도량 기와파편만 풀숲에 묻혀있고...

용성스님과 그 제자, 투사들이 숨가쁘게 오르내린 곳엔

앵두나무 한 그루가 외롭게 반겨준다


그러나 혜원스님은 얼마 후 용성스님의 위대한 업적에 대해 알고 난 후 용성스님의 유지를 받들고 독립운동의 업적을 문화재로 복원하는 일이 국가와 민족을 위한 시대적 과업임을 깨달았다. “처음에는 애로사항이 많았죠. 주무부서의 업무 소통문제, 인식 부족 등 걸림돌이 많았지만 갈수록 많은 분들이 관심 가져주었습니다. 지금 이렇게까지 온 것도 대단한 진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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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유대 법당복원 현장
지금 복원중인 봉류대 뒤로 10분여를 더 걸어 올라가면 용성스님의 법당이 있었던 자리가 또 나온다. 계곡을 사이에 두고 법당과 절간이 늠름하게 자리했던 절터가 기와파편과 함께 풀숲에 묻혀있다. 발굴조사지역이라는 푯말과 함께 푸른 천막으로 가려있지만 절을 떠받들고 있던 돌기단의 흔적들로 절의 규모가 제법 컸다는 것을 가늠할 수 있다.

그 옛날 궁녀들이 심었다는 앵두나무도 만날 수 있다.


용성스님과 제자들, 투사들이 숨 가쁘게 오르내리며 일제에 항거했던 독립운동의 현장이자 부처님의 대자대비를 궁구했던 참선의 도량이며 선농일치에 따라 스님들이 농사짓고 열매를 따던 땀방울이 스린 화과원 유허지. 마침내 60여년을 묻혀 있다가 霽月 慧圓스님(산청 보현사)과 관심 있는 이 들에 의해 서서히 그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고 있다.


함양 화과원 용성스님 문화재 복원사업에 도내 뿐 아니라 역사학계, 불교계 및 일반 주민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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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옛날 절터에는 잡초만 무성 돌담이 자리지켜

백 용성 스님은?

3ㆍ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며, 만해 한용운 스님의 정신적 스승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 찬불가를 최초로 만들어 보급하고 불경번역과 30여권의 불교서적을 저술해 불교의 대중화에 앞장섰다.


꿈속에 부처님을 뵌 이후로 해인사에 출가하여 화월화상을 은사로 혜조율사를 계사로 하여 득도 하게된다. 또 선농불교를 제창하여 참선하면서 일하는 문화를 보급했고, 종로에 대각사를 창건해 도심에서 선불교를 포교하는 일에 앞장섰다. 독립선언문에 서명하고 독립운동에 심혈을 기울였다. 화과원에서 독립자금을 모아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하고 중국에 가서도 논 밭을 사서 독립투사의 가족들을 뒷바라지 했다. 

 

왜정 때 일제가 민족문화 말살책의 일환으로 대처식육 등 승풍을 의도적으로 어지럽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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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와파편만이 역사의 눈물을 머금은채 옛 혼을 기린다
이에 항의하는 건백서를 작성, 2회에 걸쳐 총독부에 항의했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정부는 스님의 독립운동 공로로 국가공로상을 추서했고 한글학회에서는 감사패를 바쳤다.

중국에서는 나보다 남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란 뜻의 ‘내봉’이라 불리우며 독립군 가족들을 돕고 가는 정체모를 백 선생으로 더 유명하다.  

 

적멸보궁 화과원

문의(055)963-2760,972-2339

/기획취재팀김영기자,윤수영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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