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폭력 발생→학교 은폐→피해자 보호 허점→2차 폭력 발생→학교 은폐…’ 취재팀이 청소년폭력예방재단의 도움을 받아 학교폭력 상담사례 100건을 심층 분석한 결과, 허울뿐인 학교폭력 예방 시스템이 실체를 드러냈다. 현 제도는 오히려 학교폭력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악순환’ 고리로 작용했다. 심각한 폭력 사례일수록 학교 측은 ‘묻지마식 생활지도’로 일관해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또 분쟁 조정 기능을 수행하는 학교폭력대책 자치위원회는 사실상 제 기능을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결국 피해자가 전학이나 해외유학 등 극단적 선택을 할 수밖에 없도록 내몰고 있었다.
◆심각한 사례일수록 학교 발뺌=학교폭력 상담사례 100건 중 자치위가 열리지 않은 73건을 살펴보면 한 가지 유사점이 포착된다. 대부분 사례에서 가해자, 피해자 사이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했다는 것. 73건 가운데 형사 고소로 번진 경우가 23.2%(17건)로, 자치위가 열린 나머지 상담사례 27건의 형사 고소율 15.65%(5건)보다 높은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실제 사례를 살펴봐도 ▲후배에게 성매매 강요 ▲일진회 학생들이 후배에게 전단지 아르바이트를 강요한 뒤 금품 갈취 ▲급우에게 3년간 300만원 금품 갈취 등 심각한 사안에 학교는 여지없이 뒷짐을 졌다.
학교 측은 또한 사회문제로 부각되는 집단따돌림에 유독 인색한 것으로 나타났다. 따돌림 20건 가운데 학교가 자치위를 개최한 것은 단 2건(10%)에 불과했다. 즉, 따돌림 사례는 대부분 학교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재발 위험에 노출되는 셈이다. 실제로 따돌림 30건 가운데 85%(17건)은 다시 발생한 것으로 조사됐다.
그러나 자치위가 개최된 경우도 뒷맛은 개운치 않다. 피해자 보호조치가 허술하기 때문이다. 피해자에 대해 아무런 조치가 없었던 경우는 36%(10건)에 달하고, 일시보호는 4건(14%), 학급 교체는 2건(7%)에 그쳤다
◆자치위원회는 사실상 마비=지난해 3월 서울 강서구 한 초등학교로 전학한 이선희(가명·12)양 어머니는 9월이 돼서야 선희양이 급우 5명에게 따돌림과 언어폭력 등에 시달린 것을 알게 됐다. 선희양은 일주일간 등교를 거부했고, 우울증으로 6개월 치료가 필요하다는 진단까지 받았다. 학교를 찾은 선희양 어머니에게 가해학생들이 따돌림 사실을 실토했지만 학교는 미온적인 대응으로 일관했다. 학교는 자치위 개최는 물론 가해자들의 전학, 서면 사과 등 선희양 어머니의 모든 요구를 묵살했다.
이 사례처럼 학교의 자치위 기능은 사실상 마비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청예단의 초등학교 상담사례 13건 가운데 자치위가 개최된 것은 단 한 건도 없었다. 고등학교와 중학교 상담사례에서도 각각 82.1%(28건 중 23건)와 62.5%(56건 중 35건)가 자치위를 열지 않았다. 또한 자치위는 유난히 편부·모, 조부모 가정 등 취약계층에 무심했다. 이들 가정에서 발생한 학교폭력 19건 가운데 자치위원회가 열린 사례는 단 1건에 불과했다.
자치위의 파행 운영은 교육부 통계에서도 확인된다. 지난해 초·중·고등학생 학교폭력 징계 건수는 모두 6267건으로, 이를 전국 학교 수 1만165개(본교 기준)와 비교할 때 1년 동안 자치위가 한 번도 안 열린 학교가 전체의 40%에 달했다.
◆오히려 피해자가 학교 옮겨=얼굴이 예쁘장한 여자 중학교 2학년 미연(가명)양은 지난해 4월 학교 선배들로부터 집단 폭행을 당했다. 선배들이 돈을 빼앗으려다 미연양이 돈이 없다고 하자 으슥한 곳으로 끌고가 4명이 집단 폭행한 것. 미연양 부모는 곧바로 이사하면서 학교도 옮겼다.
하지만 학교폭력은 전학 간 학교에서도 계속됐다. 친구와 선배들은 “네가 얼마 전 전학 온 애냐, 예쁘다던데 얼마나 예쁜지 한번 보자”며 미연이에게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계속 보냈다. 미연이는 지난해 10월 학교 친구·선배들에게 불려가 집단 폭행을 당해 코피를 쏟았다.
취재팀의 분석 사례 100건 중 미연양처럼 피해학생이 전학을 간 경우는 모두 12건으로, 가해학생이 전학조치를 당한 경우(7건)보다 오히려 많았다. 피해학생이 전학 간 12건 가운데 학교 자치위가 열리지 않은 경우(10건·83.3%)가 열린 경우(2명·16.7%)보다 압도적으로 많아 학교의 미온적 대처가 피해학생 측의 전학을 낳는 것으로 나타났다.
청예단 이정희 선임상담원은 “부모로선 미연양이 나쁜 기억에서 빨리 벗어날 수 있도록 가해학생들과 떨어뜨려 놓겠다는 생각에서 학교를 옮긴 것”이라며 “하지만 학교의 ‘나몰라라’식 방치가 피해학생의 전학을 유도했고, 전학 후에도 낯선 환경에서 적응하기 어려워 제2, 제3의 피해에 노출된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특별기획취재팀=채희창·김형구·우한울·나기천 기자 tamsa@segye.com
■분석 어떻게 했나
취재팀은 2004년 7월 학교폭력법 시행 후 청소년폭력예방재단에 접수된 상담사례 중 연락 가능한 110여건을 1차 분석 대상으로 했다. 그러나 상당수 피해학생 부모가 고통스러운 기억에서 벗어나려고 주소지와 연락처를 바꾼 탓에 접촉이 되지 않았다. 이에 따라 2차 분석 대상 60여건을 다시 추린 뒤 전화설문조사를 벌여 100건의 폭력사례를 파악할 수 있었다. 대상 선정과 조사 과정에서 청예단 상담원들의 도움을 받았다.
취재팀은 ▲학교폭력 자치위원회 및 징계위원회 개최 여부 ▲피해·가해 학생 합의 여부 ▲형사·민사소송 결과 ▲피해학생 학업·치료 및 추가 피해 현황 등 일정 기준에 맞춰 컴퓨터 프로그램 엑셀에 입력해 DB화했다. DB화된 사례 100건을 통해 학교폭력 실태를 다양한 가설에 근거해 입체적으로 분석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