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로 핀 우리 문화
페이지 정보
작성자 향기로 핀 우리 문화 댓글 0건 조회 792회 작성일 07-01-30 09:08본문
향낭, 솔잎 향기에서 백련차까지 | ||||||||||||
빛과 소리처럼 많은 정보를 전달해 주지도 못하고, 촉감처럼 형태가 있는 것도 아니며, 맛처럼 풍부한 만족감을 주지도 못하는 것이 후각이다. 하지만 아름답게 피어있는 꽃 한 송이,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봄비, 오래되고 손때 묻은 물건들, 그리고 사랑스러운 가족과 연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는 나름의 냄새가 배여 있다. 그렇기에 ‘냄새’가 가져다주는 효과는 은은하지만 강렬하다. 또한 빛도, 소리도, 촉감도 느끼지 못했을 아주 오랜 옛날 원시적인 생명체들에게는 주위를 떠다니는 분자들을 구별해 감지할 수 있는 능력, 즉 후각이 가장 중요한 감각 기관이었을 것이다. 후각은 다른 어떤 감각보다도 오래되고 본능적인 감각인 셈이다. 그러나 지금 내가 마시고 있는 한 잔의 차를 비롯하여 ‘샤넬 No.5'로 대표되는 수많은 향수들, 그리고 후추, 바질(basil), 파슬리(parsley) 등의 각종 향신료까지. 내 주위를 맴돌고 있는 ‘향기’들은 어째서 하나같이 꼬부랑 알파벳 이름을 가진 것들이 대부분일까? 애써 우리가 가진 독특한 향기의 이름을 기억해 내보려고 노력했지만 떠오르는 것이 없다. 정말로 우리나라에는 이런 ‘향기’가 없었을까? 염려했던 것과는 다르게 우리나라의 ‘향기’를 찾아가는 과정은 의외로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우선,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종류의 향기를 다양한 형태로 즐겨왔었다는 사실에 놀라야 했다. 또한 그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다는 사실에서 다시 한 번 놀라야만 했다. 문헌에 기록되어 있는 우리나라 향기의 역사는 삼국시대까지도 거슬러 올라가고, 향기와 관련된 여러 가지 관습과 전통 역시 풍부하게 존재했었기 때문이다. 옷깃에 스며든 우리나라의 향기
우리나라는 오래 전부터 향낭을 생활 속에서 사용했다. 특히 삼국시대의 신라인들은 남녀노소 누구나 할 것 없이 향낭을 허리에 차고 다니는 풍습이 있었다. 그들에게 향기는 특별한 사치품이나 귀중품이기보다는 일상적인 생활의 한 부분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관습은 고려시대에까지 이어져 내려왔다. 1123년(인종 1년)에 서긍(徐兢)이라는 송나라 사신이 고려의 수도인 개경에 1개월 가량 머물고 돌아간 일이 있는데, 그 사신이 귀국 후에 지은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이라는 책에는 그 당시 고려의 모습이 자세히 나와 있다. 이 책을 통해 고려시대의 사람들이 향기를 어떻게 품고 살았는지를 알아 볼 수 있다.
이 기록을 통해 고려시대의 사람들이 상당히 다양한 형태로 향기를 즐겼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그 시대에도 요즘의 향수와 비슷한 향유(香油, 향기로운 냄새가 나는 기름)라는 것이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향유보다는 향낭을 차는 것을 즐겼고, 그 개수가 많은 것을 자랑 삼았다니 의외로 독특한 구석이 있는 향기 문화를 가졌던 모양이다. 게다가 수를 놓은 베개(繡枕,수침)에 향초를 넣어 잠을 잤다니, 요즘으로 말하자면 수면 아로마테라피라고 해야 하나? 음식에 배인 우리나라의 향기 향기는 맡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먹기도 한다. 우리가 향신료라고 부르는 것들이 바로 그것이다. 흔히 알고 있는 후추, 칠리, 바질(basil), 파슬리(parsley) 등은 서양에서 물 건너온 향신료들이고 마늘, 파, 생강, 고춧가루 등은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향신료들로 ‘양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향신료들이 풍기는 향기와 잘 어우러진 음식의 맛은 그렇지 못한 음식에 비해 훨씬 깊고 뛰어나다. 하지만 이런 향신료들은 우리에게 그다지 새롭지 않다. 후추, 마늘, 파, 고춧가루 등을 음식에 넣어 먹어 온 것이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닌 탓이다. 하지만 이것 말고도 우리나라 음식에 배인, 재미있는 향기가 한 가지 있다. 바로 추석에 먹는 송편에 배인 솔향기다.
하지만 송편에 배인 솔잎의 향기는 향기만으로 끝나지지 않는다. 솔잎과 어우러진 송편에는 더욱 깊은 솔잎 향기의 비밀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식물은 자신을 공격하는 세균, 곰팡이 같은 미생물에 대응하기 위해서 피톤치드(phytoncide)라 불리는 여러 가지 살균물질들을 분비한다. 삼림욕을 통해 장과 심폐기능이 강화되고 면역력이 증가하는 것은 숲속의 식물들이 분비하는 피톤치드의 효과 덕분이다. 그런데 특히 소나무가 뿜어내는 피톤치드는 보통 나무의 열 배 정도로 아주 강력하다. 옛말에 ‘소나무 근처에서는 퇴비를 만들지 마라’고 한 것은 피톤치드에 의한 소나무의 항균력이 너무 강한 탓에 퇴비가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뜨거운 수증기에 의해 한껏 뿜어져 나온 솔잎의 피톤치드를 빨아들인 송편은 오랫동안 상하지 않고 맛도 변하지 않는다. 향기를 코를 통해 즐기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실생활에 유용하게 사용하기도 했던 한 예인 것이다. 또한 구더기를 없애기 위해 화장실에 할미꽃 뿌리나 쑥을 걸어 두기도 했고, 바퀴벌레를 쫓기 위해 은행나무 잎을 집안 구석구석에 뿌려 두었던 것도 식물들이 뿜어내는 피톤치드를 활용한 지혜이다. 찻잔에 피어오르는 우리나라의 향기 향낭도 좋고 음식도 좋지만, 뭐니 뭐니 해도 ‘향기’의 으뜸은 갓 끓여낸 한 잔의 차(茶)에서 피어오르는 그것이다. 그만큼 차는 맛이 아닌, 향기로 마시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로즈마리, 라벤더, 케모마일, 애플민트 등 널리 알려져 있는 대표적인 허브(Herb)들도 다양한 활용법이 존재하지만, 끓은 물에 우려낸 허브티(Herb tea)로 가장 많이 애용되는 것은 이것이 허브의 향기를 가장 훌륭하게 즐길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도 이처럼 향기로 마시는 차가 있었을까? 물론 대중적으로 알려진 녹차 말고도, 우리나라에도 뛰어난 향기와 맛을 가진 훌륭한 차들이 아주 많이 있다. 백련차(白蓮茶)는 하얀색의 연꽃잎을 이용해 만든 우리나라의 전통차이다. 이 차의 특징은 연꽃잎을 이용해 만든 차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차를 우릴 때는 연꽃잎이 한 조각도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만들었기에 그것이 가능할까? 백련차를 만들기 위한 흰 연꽃을 채취하기 전에 우선 품질 좋은 녹차를 준비해야 한다. 준비된 녹차는 작은 모시 주머니에 담는다. 연꽃이 개화할 때 즈음 아직 피지 않은 연꽃 봉우리를 따온다. 그리고 준비되었던 녹차 주머니를 꽃봉오리 안에 넣고, 명주실과 한지를 이용해 봉오리가 벌어지지 않도록 잘 묶어준다. 약 48시간 정도가 지나면 연꽃의 향기가 녹차에 진하게 스며들고, 그 후 녹차를 꺼내 다시 덖어주면 연꽃향기가 가득한 백련차가 완성된다. 향기로 만들고, 향기로 마시는 진정한 향차(香茶)인 것이다. 백련차는 흰 연꽃이 귀한 탓에 부유한 사람들만이 즐길 수 있는 고급차에 속한다. 그러나 주위를 둘러보면 쉽게 구해 즐길 수 있는 향차도 눈에 많이 띈다. 대표적으로 둥굴레차가 그 예이다. 숭늉과 비슷한 구수한 향기로 서민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차이다. 또한 달고, 시고, 쓰고, 맵고, 짠 다섯 가지 맛을 낸다는 오미자차도 나쁘지 않다. 오미자의 씁쓸한 맛이 싫다면 설탕보다 달다는 감차(甘茶)를 즐겨보도록 하자. 이 차는 말린 잎 한 장만 주전자에 넣어도 물 전체가 달콤한 차가 된다. 그밖에도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훌륭한 향차들이 우리나라에는 많이 있다. 로즈마리, 라벤더 같은 허브도 좋지만, 하루만큼은 잠시 미뤄두고 우리나라의 전통 향차를 찾아보는 것이 어떨까? 그렇게 우리는 향기로웠다.
‘냄새’는 분명, 공기 중에 떠돌고 있는 휘발성 분자들이 콧속의 후세포를 자극하여 일으키는 현상에 불과하다. 어차피 종류만 조금씩 다른 신경세포의 전기신호에 불과할 따름이다. 하지만 그것이 ‘향기’로 남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그것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냄새를 향기로 받아들여 아끼고 사랑하는가는 전적으로 사람의 마음에 달려 있다. 우리가 우리의 향기를 잃어버린 채 살아왔다면, 그것은 곧 우리의 마음을 잃고 살아왔다는 뜻일 것이다. 우리의 향기는 변함없이 우리의 주변을 맴돌고 있으니, 이제는 그 향기를 아끼는 마음을 되찾아야 하지 않을까? |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