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서 손 씻으면 안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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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거기서!” 댓글 0건 조회 1,613회 작성일 07-02-06 08:49본문
환경운동연합 시절의 독특한 시위. 대기오염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이순신 장군 동상에 방독면을 씌웠다. <경향신문> |
마산요양원(현 국립마산병원)에서 바라보는 ‘가고파’의 고향 마산만은 정말 아름다웠다. 마산에 내려온 김에 김동진·장지연 선생 등의 자취를 더듬던 장을병(전 한국학중앙연구원장)은 마산만의 정취에 흠뻑 취해버렸다. 팔을 걷어붙이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아름다운 바다에 손을 담그지 않고서는 도저히 서울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장을병 교수 썩은 마산만에 충격
1980년 성균관대에서 해직됐다가 5공 신군부의 유화조치로 1984년 복직한 장을병은 마산 가톨릭여성회관의 초청을 계기로 본격적인 ‘시국 강연’에 나섰다. 그는 마산에서 강연한 뒤 그곳 지인의 안내로 이곳저곳 돌아보며 ‘시국 구상’을 가다듬던 중이었다. 1980년대 대표적 ‘참여 지식인’인 그의 마산만 방문은 환경운동사에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될까.
“교수님, 잠깐!”
해안으로 내려가 바닷물에 손을 담그려던 그를 누군가가 급하게 제지했다.
“거기서 손 씻으면 안 돼요!”
하지만 그의 손은 이미 물속에 한 번 들어갔다 나온 뒤였다. 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올렸다. 꺼림칙한 느낌과 함께 역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아! 그제야 그는 몽환에서 깨어났다. 바닷물 색깔이 너무 좋아서 몰랐는데 이럴 수가! 이 아름다운 바다가 완전히 썩어 손을 담글 수조차 없다니…. 그 순간 그의 내면에서 잔잔히 흐르던 ‘가고파’의 선율도 뚝 끊겼다.
서울로 돌아온 장을병은 ‘팔’을 더욱 걷어붙인다. 오염된 바다가 아니라 형편없는 인권상황, 혼탁한 정치상황에 손을 담그기 위해서였다. 정치학자인 그에게 정치는 학문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1987년 그는 6월항쟁의 지도부인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공동대표를 맡게 된다.
하지만 ‘마산만의 충격’을 그가 잊은 것은 아니었다. 1993년 4월 출범하는 환경운동연합 대표를 맡아달라는 최열(현 환경재단 대표)의 요청을 그가 두 말 않고 수락한 배경에는 중요한 역사적 의미가 담겨 있다. 환경운동과 환경운동연합의 위상과 관련된 시대상황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산만 방문을 계기로 그는 환경문제의 심각성을 자각했지만 거기에 눈 돌릴 여유를 갖지 못했다. “당시는 인권이 크게 침해되던 시절이라 그런 생각을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는 게 그의 최근 회고다. 즉 환경문제를 경시한 게 아니라 잠시 ‘유보’한 것이었다. 그의 얘기를 들어보면….
“서울로 올라와서 유인호 교수(중앙대, 1992년 작고)와 그런 얘기를 했다. ‘그 아름다운 경관이 손을 넣을 수 없는 지경이 돼 있더라’고 했더니 유 교수가 말했다. ‘이제까지 마산공단에서 얻어낸 총수익을 다 집어넣어도 마산만을 전처럼 되살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때 느낀 게 아, 이거 늦으면 안 되겠구나… 환경운동이 얼마나 절박한 일인지 확인했다. 그래서 민주화도 좀 되고 나도 성대 총장이 되고 해서 다음에 할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일차적으로 환경운동을 떠올렸고, 그래서 환경운동연합에 참여한 것이다. 크게 역할은 하지 못했지만….”
영화로 치면 환경운동연합은 ‘블록버스터’와 같은 초호화 배역으로 ‘크랭크인’됐다. 주연 배우이자 총기획·총감독인 최열은 처음부터 ‘예술영화’나 ‘독립영화’가 아닌 ‘블록버스터’를 꿈꿨다. 환경의 ‘환’자와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우리 사회의 모든 인적 자원을 총동원했고, 무모하다고 할 정도의 ‘초호화 세트’와 ‘최첨단 촬영기술’을 도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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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운동연합 초대 공동대표 장을병, 시민환경연구소장 고철환, 환경연수원장 송상용, 환경법률센터 소장 김호철(왼쪽부터). |
이치범 ‘함께 사는 길’ 편집국장에
138명에 이르는 창립 임원은 당시 시민사회와 전문가 그룹의 진수라고 할 만하다(상자 기사 참조). 뒷날 이 가운데서 국무총리 1명(한명숙), 장관 4명(김성훈 농림, 손숙 환경, 이상수 노동, 박용일 국정원), 정당 대표 2명(이부영·장을병)이 배출된 것만 봐도 그 폭과 깊이를 가늠할 수 있다. 오세훈(현 서울시장)·이치범(현 환경부 장관) 등 중앙조직의 실무진과 이재용(전 환경부 장관) 등 지역조직의 활동가는 제외한 면면이다.
한국공해문제연구소(이하 공문연)가 창립 이사회를 통해 처음으로 문을 연 때는 1981년 12월 15일이었다. 당시만 해도 운동권에서는 ‘우스워서’, 전문가 그룹에서는 ‘무서워서’ 참여를 꺼렸던 게 환경운동이었다. 공문연을 자신의 뿌리 조직으로 삼고 있는 환경운동연합조차 서울 혜화동 사무실 개소식 일자인 1982년 5월 3일을 공문연 창립일로 삼을 정도로 허술하게 출발한 환경운동이 10여 년 만에 급성장한 비밀이 어디에 있을까.
서울대 독어교육과 74학번인 이치범은 서울고 흥사단아카데미 출신이었다. 대학 시절에는 특별히 운동권 조직에 몸담지 않았지만 그의 고교 선배이자 긴급조치 9호 시대 서울대 운동권의 거물 중 한 명인 이범영(1994년 작고)의 영향으로 학생운동에 직·간접적으로 관계했다.
하지만 졸업 후 그는 다른 길을 택했다. 서울대 대학원에서 철학을 공부하고는 독일 프랑크푸르트대로 유학을 떠났다. 1983년 귀국해서는 인천대·광운대 등에 출강했다. 그런 그가 한국 나이로 40세가 되는 1993년 초 뒤늦게 전업운동가의 길로 뛰어든 것은 장을병의 환경운동연합 참여와 궤를 같이하면서도 또다른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 일단 그의 얘기를 직접 들어보자.
“학교 다닐 때부터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고 학생운동에도 관여했다. 독일 유학에서 돌아와서도 사회문제에 대해 시민으로서 발언을 하는 것이 한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의 입장에서 올바른 삶이라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었다. 그런 참에 최열 선배를 만나면서 아, 이거 한번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어….”
이치범은 최열의 권유로 환경운동연합에 참여, 회지 성격의 잡지인 ‘함께 사는 길’ 편집국장에 이어 사무처장을 맡는다. 환경을 중요한 문제로 다루는 독일에서의 유학생활이 그가 환경운동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밑거름이 됐을 것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의 사회에 대한 ‘부채의식’을 해소시켜줄 수 있을 정도로 환경운동의 위상과 지평이 그만큼 확장된 점일 것이다.
김호철(변호사, 현 환경운동연합 지도위원)은 환경운동권의 중심세대인 1963년생이다. 고려대 법대 82학번으로서 교회를 통해 사회운동에 어렴풋이 접한 것 외에는 특별한 학생운동 경력이 없었다. 사법시험도 대학원 재학 중인 1988년에 합격, 비교적 순탄하게 주류사회에 진입했다.
그가 환경운동에 투신한 것 역시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다. 비(非)운동권 또는 반(半)운동권의 참여는 운동의 대중화를 위한 필수요소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전문 엘리트 그룹은 운동의 고도화를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자원이다. 무엇이 그를 환경운동가의 길로 이끌었을까.
“고시에 붙고 나서 돌아보니 격동의 세월에 별로 한 게 없다는 죄의식이 들었다. 법조인으로서 유용한 일을 하고 살아야겠는데 마땅한 게 생각나지 않았다. 그렇게 빈둥거리고 있는데 어느 날 TV에서 원진레이온 사건을 다룬 프로그램이 방영됐다. 문득 산업재해가 아니라 열악한 작업환경에서의 공해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해문제, 즉 환경법의 문제로….”
뒷날 국무총리 1명 장관 4명 배출
위_ 2006년 6월 7일 서울시장직 인수위 첫 회의에 참석한 오세훈 서울시장 당선자(왼쪽)와 최열 공동인수위원장. 아래_ 2006년 4월 18일 ‘친정’ 인 환경운동연합 사무실을 방문한 이치범 환경부 장관. |
이들은 배움마당 과정을 마친 뒤에는 공추련 활동 회원으로 참여했다. 김호철은 법률상담은 물론 ‘지구의 날’ 행사 때 전단 나누고 포스터 붙이고 T셔츠를 파는 등 ‘몸으로 때우는’ 일도 불사했고, 반핵운동에 뛰어들기도 했다.
환경운동은 내부에서조차 ‘부문운동’의 하나로 인식하던 시절이 있었지만 여러 분야의 전문성을 토대로 한 종합운동이다. 초기에 공학·의학·법학 등 몇 가지 영역이 전문성과 관련된 주된 관심사였지만 환경운동연합 출범 무렵에는 사회학·철학적 영역까지 그 범위가 확장돼 있었다. 사실 모든 학문 이름에 ‘환경’ ‘생태’를 갖다붙여도 무리가 없게 된 것이다.
최열이 리스크가 큰 ‘블록버스터’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환경문제와 환경운동에 대한 시대적 요구와 이를 수용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상당 수준에 이른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 치밀한 사전준비가 있었던 점이다.
환경운동연합은 공추련 말기에 이전한 서울 종로구 신문로1가 덕수제과 빌딩 3개 층을 그대로 사무실로 사용했다. 시민단체가 서울 중심가에 보증금 1억 원짜리 사무실을 쓰기가 쉽지 않았지만 그는 무리를 무릅쓰고 일단 계약해놓고 보았다.
아시아 최대 환경단체 면모 갖춰
전문성 확보를 위한 기구들도 이미 공추련 시절부터 구축한 조직을 확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가장 역점을 두었던 시민환경연구소는 공추련 연구위원회를 확대 개편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 초대 소장인 고철환(현 서울대 교수, 전 지속가능발전위원장)은 시민환경연구소를 염두에 두고 공추련 연구위원장으로 미리 영입한 케이스였다. 최열의 회고를 들어보면….
“초창기에는 독자적으로 분석하고 실험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려고 했다. 그렇게 하면 비용이 많이 들 뿐 아니라 시약을 버리는 것도 처리가 간단치 않은 문제였다. 그런 것은 전두환·노태우 시절의 얘기고 김영삼 정부 들어서는 사정이 달라졌다. 연구 전문가들만 갖추고 그들이 갖고 있는 시설을 이용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그래서 고철환 교수가 초대 소장이 된 것이다.”
환경정보센터 역시 1990년부터 정보화 시대에 대비해 구축한 자료정보실을 확장한 것이었다. 뒷날 상근 변호사까지 두게 되는 환경법률센터 또한 공추련 환경법률상담실을 기반으로 했다. 강원도 홍천에 마련한 환경연수원은 공추련의 주요 사업 중 하나였던 교육 기능을 발판으로 한 것이었다.
환경문제에 대한 사회학적 접근은 이시재(현 가톨릭대 교수)의 주도로 이뤄졌다. 그의 소개로 과학철학자 송상용(현 환경운동연합 환경교육센터 이사장, 전 한림대 교수)이 영입됐다. 생명윤리 문제 등에서도 알 수 있듯이 철학적 바탕 없는 환경운동은 공허할 수밖에 없다. 그는 환경연수원장, 서울환경운동연합 시민환경대학장 등을 담당했다.
마지막 작업은 잡지의 발간이었다. 각 단체별로 내는 회지를 하나로 묶어 시중 판매가 가능한 잡지 수준으로 격상할 필요가 있었다. 이치범을 영입한 것은 바로 이 일을 위해서였다.
지역조직을 규합하고 중앙조직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배치를 모두 마친 최열은 잠시 한숨을 돌렸다. ‘블록버스터’는 거의 완성돼가고 있었다. 한국의 진보적 시민단체가 전문 연구소와 전용 연수원, 법률센터, 정보센터, 상업 잡지 등을 모두 갖는 것은 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그런데 아시아 최대 환경단체의 진군 나팔을 울리기 위해서는 아직 한 가지 일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최열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환경운동연합 초대 임원진
■공동대표
박경리(소설가) 이세중(대한변협 회장) 장을병(성균관대 총장)
■고문
강원룡(크리스챤아카데미 원장) 김관석(목사) 공덕귀(윤보선 전 대통령 부인) 서영훈(전 KBS 사장) 권숙표(연세대 명예교수) 서한태(의사) 김수환(추기경) 송건호(한겨레신문 회장) 김영관(전 해군참모총장) 이돈명(전 조선대 총장) 김용준(고려대 명예교수) 이효재(이화여대 명예교수) 김훈수(서울대 명예교수) 최기철(서울대 명예교수) 박권상(언론인) 노융희(서울대 명예교수)
■사무총장
최열(전 공추련 의장)
■시민환경연구소장
고철환(서울대 해양학과 교수)
■감사
이대용(공인회계사) 이병철(전 가농 사무국장)
■지도위원
- 정책위원회: 강신구(경향신문 전산제작국장) 배동인(강원대 사회학과 교수) 양길승(성수의원 원장) 윤준하(한알(주) 대표) 이병철(전 가농 사무국장) 이부영(민주당 최고위원) 이수훈(경남대 사회학과 교수) 이시재(성심여대 사회학과 교수) 전홍준(조선대 의대 교수) 정성헌(우리밀살리기운동 본부장) 황태연(서울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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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위원회 구희숙(환경운동가) 문선경(환경운동가) 손덕수(효성여대 교수) 손숙(연극인) 윤정모(소설가) 인병선(시인) 이선옥(방통대 교수) 이추경(환경운동가) 이정숙(환경운동가) 한명숙(한국여성단체연합 공동대표)
- 연구위원회: 강헌(수원대 환경공학과 교수) 고철환(서울대 해양학과 교수) 김동술(경희대 환경학과 교수) 김상종(서울대 미생물학과 교수) 김윤신(한양대 의대 교수) 박용철(인하대 해양학과 교수) 송동헌(중앙대 약대 교수) 유근배(서울대 지리학과 교수) 윤정노(과학기술대 교수) 이경재(서울시립대 조경학과 교수) 이무춘(상명여대 조경학과 교수) 이창복(서울대 해양학과 교수) 이항규(에너지 전문가) 장회익(서울대 교수) 주왕기(강원대 약대 교수) 최병선(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최창조(전 서울대 교수)
- 교육위원회: 김승훈(왕십리성당 주임신부) 박동서(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송상용(한림대 교수) 이영선(CBS이리 방송국장) 임춘식(한남대 교수) 함세웅(장위동성당 주임신부)
- 회원조직위원회: 구요비(상계동성당 주임신부) 박재창(숙명여대 행정학과 교수) 박종권(중소기업은행 검사역) 원격(신륵사 주지스님) 유재천(서강대 교수) 임영담(석왕사 주지스님) 호인수(김포성당 주임신부) 장두석(민족의학자)
- 행사기획위원회: 김정헌(화가, 공주사대 교수) 문성근(영화배우) 서유석(방송인) 심우성(민속학자) 여운(화가, 한양여전 교수) 오승우(서양화가) 이장호(영화감독) 임진택(민예총 사무총장) 정태춘(가수) 최도영(MBC PD) 황인용(방송인)
- 대외협력위원회: 박재일(우리밀살리기운동 공동대표) 박창빈(목사, NCC 환경위원장) 박현서(한양대 교수) 송학선(치과의사) 오흥진(71동지회장) 이경국(신협중앙회 사무총장) 이영희(인하대 법대 교수) 조상호(나남출판사 대표) 조준희(변호사) 홍성우(변호사)
- 법제위원회: 박용일(변호사) 박인제(변호사) 이석태(변호사) 이상수(변호사) 정인봉(변호사) 최병모(변호사) 조두연(변호사) 한기찬(변호사)
*( ) 안은 1993년 4월 2일 현재 직함임
환경운동연합 참여단체 임원 및 상근 활동가
■공해추방운동연합
임 원: 최열(의장) 고철환 이시재 윤준하 임진택 인병선 이수훈 황상규(사무국장) 조두연 유근배 이경재
상근자: 최열 황상규 박상철 손미경 문승식 권헌열 최예용 박현숙 홍혜란 이근행 김미화 서희순 김영란 최재숙 류정란(김혜정 이성실 여진구 최상순 박응준은 일시휴직 상태)
■부산공해추방시민운동협의회
임 원: 조창섭(상임의장) 손덕만 엄종섭(이상 공동의장) 강신익 정명숙 육순종 구자상(사무국장)
상근자: 구자상 김태환 이성근 최인화
■대구공해추방운동협의회
임 원: 정학(상임의장) 서홍길(공동의장) 이재용 하종호(사무국장) 최병두 조무환
상근자: 하종호
■광주환경운동시민연합
임 원: 서인근(의장) 이황 임낙평(사무국장)
최도성 오재일 김양옥 이양규 이우송 박치장 한정만
상근자: 임낙평(박미경 등 2명이 내부 사정으로 활동중단 상태)
■울산공해추방운동연합
임 원: 한기양(상임의장) 강정량 최영준(이상 공동의장) 손진철(사무처장) 조인희 박해양
상근자: 이춘근
■마산창원공해추방시민운동협의회
임 원: 양운진(상임의장) 강경구 민계숙 정철성 송재덕 이병규 임홍길 정순자 이인식(사무국장) 정경숙 조현순
상근자: 하경란 임희자
■진주 남강을 지키는 시민의 모임
임 원: 강대승(회장) 박희권 안병후 손현숙 이명균 김성재 이종렬 조현숙 오전옥 성인기 김석창 장승환(사무국장) 이한우 정지근
상근자: 정봉애
■목포녹색연구회 자료
임 원: 서한태(회장) 유재열 김창용 장근식(총무) 이건일 김용호 장운초 유기문 김천옥
상근자: 장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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