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0.기자회견시 북한군 대위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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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증언 댓글 0건 조회 1,676회 작성일 07-01-25 14:51본문
안녕하십니까? 자유북한군인연합 공동대표 최중현입니다.
북한군 특수부대 정치군관으로 15년을 김일성, 김정일 부자를 위해 ‘총폭탄’이 돼서 죽을 각오로 충성을 다 하다가 속아 살아왔음을 깨닫고 자유를 찾아 남한에 온 저는 무너져가고 있는 대한민국의 안보위협에 대한 불안한 마음을 떨쳐 버릴수가 없어서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백주에 간첩이 맹활약을 해도 잡지 않거나 잡아도 처벌조차 제대로 할수 없고 서울 한복판에 인공기가 휘날려도 무방한, 우리가 살고 있는 이땅이 과연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수도 평양인지,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인지 도무지 분간이 가지 않는 현실, 북한사람보다 더 친북적인 정신나간 좌파세력들이 국가, 사회전반의 요주에 틀고 앉아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난도질 하고 있는것이 대한민국 안보의 현 주소입니다.
분단 반세기가 넘도록 ‘자주, 평화, 우리민족끼리’라는 허울 좋은 보자기에 감춰진, 김일성, 김정일로 이어지는 북한의 대남적화통일 야망은 변하지 않았고 또 변할수도 없습니다.
김일성, 김정일은 기회가 있을때마다 심복들에게 ‘연방제 통일은 평화적 방법으로 가능할지 모르나 남조선혁명은 폭력적 방법이 아니고는 불가능 하다, 평화적 방법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강조해 왔습니다.
남한 내 친북세력들이 미군기지를 공격하며 미군철수를 주장하는 폭력 집회와 4.19나 광주봉기처럼 민주, 평화, 자주를 외치는 격력한 시위가 전국을 뒤 덮을 때 민주, 애국투사들을 구한다는 명분으로 무력 개입한다는 전략입니다.
역대 남한에서 벌어진 크고 작은 불행한 사건들에는 빠짐없이 북한이 직, 간접적으로 개입해 왔습니다.
다른 것은 접어 두고라도 한국 민주화운동의 상징인 5.18광주민중항쟁의 경우에도 현역 북한군 출신들, 특히 특수부대 출신들은 북한군 최정예 특수부대가 투입됐다는 정도는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다음은 1976년 8월 대남공작원들에게 한 김일성의 비밀지령과 80년 5월 중앙당 3호청사 부장회의에서 한 김일성의 비밀 지령의 전문입니다.
“남조선에서 노동자들이 드디어 들고일어났습니다. 사북 탄광의 유혈사태는 반세기에 걸친 식민지 통치의 필연적 산물이며 인간 이하의 천대와 멸시 속에서 신음하던 노동자들의 쌓이고 쌓인 울분의 폭발입니다.
남조선 혁명가들과 지하혁명 조직들은 이번 사북 사태가 전국으로 확산되도록 적극 불을 붙이고 청년학생들과 도시 빈민 등 각계 각층 광범한 민중들의 연대투쟁을 조직 전개하여 더 격렬한 전민 항쟁으로 끌어올려야 합니다.”
“결정적 시기가 포착되면 지체 없이 총 공격을 개시해야 합니다. 전국적인 총파업과 동시에 전략적 요충지대 곳곳에서 무장봉기를 일으켜 전신 전화국, 변전소, 방송국 등 중요 공공시설들을 점거하는 동시에 단전과 함께 통신 교통망을 마비시키고 임시혁명정부의 이름으로 북에 지원을 요청하는 전파를 날려야 합니다. 그래야 남과 북의 전략적 배합으로 혁명적 대 사변을 주동적으로 앞당길 수 있습니다.”
광주봉기의 도화선이 됐던 사북탄광사태 직후 김일성일 왜 이런 지령을 내렸겠습니까?
5.18사태 당시 함경남도에 위치해 있던 저희 부대는 전투동원상태에 진입하라는 군단참모부의 명령을 받고 완전 무장한 상태에서 신발도 벗지 못한 채24시간 진지를 차지하고 광주사태에 대해 긴급 속보로 전해 들으면서 20여일간이나 출전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단 정치부 비 편제 서기로 자주 동원됐던 저는 나중에야 당시 사단장이였던 여병남과 군단 참모장이였던 김두산의 대화를 통해 특수부대 1개 대대가 광주에 침투했었고 희생도 많았지만 공로가 컸다는 말을 귀 동냥으로 얻어 들을수가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북한군 특수부대 지휘관들 사이에서는 광주에 특수부대가 침투 했었다는 말이 공공연한 비밀로 나 돌았습니다.
최근에는 북한군 4군단 70정찰대대 전투원으로 복무했던 이덕선씨로부터 당시 정찰국 소속 정찰대대들의 광주 침투 상황에 대해서 비교적 상세한 얘기를 들을수가 있었습니다.
이덕선(가명)씨에 따르면 광주봉기 시 2군단 정찰대대를 모토로 하고 각 특수부대들에서 선발한 최정예 전투원 1개 대대가 해상을 통해 남파됐으며 그중 3분의 2가 회생되고 나머지 인원이 귀대 했다고 합니다.
이덕선씨가 알고있는 광주봉기 침투자는 조장이였던 4군단 70정찰대대 상좌 황종인, 부조장이였던 4군단 33사단 중좌, 조원으로 침투했던 4군단 정찰대대 작전집체조의 홍씨성을 가진 참모였다고 합니다.
통상 북한 당국은 남파돼서 임무를 수행하고 귀대하거나 임무수행 중 사망한 공작원 또는 전투원에게 공화국영웅칭호와 함께 각종 훈장을 수여하는데 그 수는 1년에 불과 10손가락안에 꼽히는 정도 였습니다.
이덕선씨에 따르면 80년에 2군단 75정찰대대에서만도 41명의 공화국 영웅이 배출됐고 타 부대들에서 21명 도합 62명의 영웅이 나왔다고 합니다. 북한의 경우 평화시기에는 남파간첩이나 전투원이 아닌 경우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이밖에서 당시에는 국군에 없었던 칼빈이나 M1에 맞은 시신이 수십구라든가, 봉기자들이 정부군의 탱크와 장갑차를 탈취해 진압군을 공격했다든가,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시신이 있는 등 아직 밝혀지지 않은 문제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북한에서의 체험과 이상의 근거들만 가지고도 저는 광주민주항쟁에는 분명히 북한군이 개입했다고 확신합니다.
대남적화통일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억울한 영령들이 신성한 민주시위를 유혈 폭동으로 몰아간 김일성과 같은 백정의 제물로 바쳤을지도 모르는 5.18광주민주화 영령들에게 심심한 애도의 뜻을 표하면서 광주사태의 진실은 반드시 밝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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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 특수부대 정치군관으로 15년을 김일성, 김정일 부자를 위해 ‘총폭탄’이 돼서 죽을 각오로 충성을 다 하다가 속아 살아왔음을 깨닫고 자유를 찾아 남한에 온 저는 무너져가고 있는 대한민국의 안보위협에 대한 불안한 마음을 떨쳐 버릴수가 없어서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백주에 간첩이 맹활약을 해도 잡지 않거나 잡아도 처벌조차 제대로 할수 없고 서울 한복판에 인공기가 휘날려도 무방한, 우리가 살고 있는 이땅이 과연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수도 평양인지,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인지 도무지 분간이 가지 않는 현실, 북한사람보다 더 친북적인 정신나간 좌파세력들이 국가, 사회전반의 요주에 틀고 앉아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난도질 하고 있는것이 대한민국 안보의 현 주소입니다.
분단 반세기가 넘도록 ‘자주, 평화, 우리민족끼리’라는 허울 좋은 보자기에 감춰진, 김일성, 김정일로 이어지는 북한의 대남적화통일 야망은 변하지 않았고 또 변할수도 없습니다.
김일성, 김정일은 기회가 있을때마다 심복들에게 ‘연방제 통일은 평화적 방법으로 가능할지 모르나 남조선혁명은 폭력적 방법이 아니고는 불가능 하다, 평화적 방법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강조해 왔습니다.
남한 내 친북세력들이 미군기지를 공격하며 미군철수를 주장하는 폭력 집회와 4.19나 광주봉기처럼 민주, 평화, 자주를 외치는 격력한 시위가 전국을 뒤 덮을 때 민주, 애국투사들을 구한다는 명분으로 무력 개입한다는 전략입니다.
역대 남한에서 벌어진 크고 작은 불행한 사건들에는 빠짐없이 북한이 직, 간접적으로 개입해 왔습니다.
다른 것은 접어 두고라도 한국 민주화운동의 상징인 5.18광주민중항쟁의 경우에도 현역 북한군 출신들, 특히 특수부대 출신들은 북한군 최정예 특수부대가 투입됐다는 정도는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다음은 1976년 8월 대남공작원들에게 한 김일성의 비밀지령과 80년 5월 중앙당 3호청사 부장회의에서 한 김일성의 비밀 지령의 전문입니다.
“남조선에서 노동자들이 드디어 들고일어났습니다. 사북 탄광의 유혈사태는 반세기에 걸친 식민지 통치의 필연적 산물이며 인간 이하의 천대와 멸시 속에서 신음하던 노동자들의 쌓이고 쌓인 울분의 폭발입니다.
남조선 혁명가들과 지하혁명 조직들은 이번 사북 사태가 전국으로 확산되도록 적극 불을 붙이고 청년학생들과 도시 빈민 등 각계 각층 광범한 민중들의 연대투쟁을 조직 전개하여 더 격렬한 전민 항쟁으로 끌어올려야 합니다.”
“결정적 시기가 포착되면 지체 없이 총 공격을 개시해야 합니다. 전국적인 총파업과 동시에 전략적 요충지대 곳곳에서 무장봉기를 일으켜 전신 전화국, 변전소, 방송국 등 중요 공공시설들을 점거하는 동시에 단전과 함께 통신 교통망을 마비시키고 임시혁명정부의 이름으로 북에 지원을 요청하는 전파를 날려야 합니다. 그래야 남과 북의 전략적 배합으로 혁명적 대 사변을 주동적으로 앞당길 수 있습니다.”
광주봉기의 도화선이 됐던 사북탄광사태 직후 김일성일 왜 이런 지령을 내렸겠습니까?
5.18사태 당시 함경남도에 위치해 있던 저희 부대는 전투동원상태에 진입하라는 군단참모부의 명령을 받고 완전 무장한 상태에서 신발도 벗지 못한 채24시간 진지를 차지하고 광주사태에 대해 긴급 속보로 전해 들으면서 20여일간이나 출전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단 정치부 비 편제 서기로 자주 동원됐던 저는 나중에야 당시 사단장이였던 여병남과 군단 참모장이였던 김두산의 대화를 통해 특수부대 1개 대대가 광주에 침투했었고 희생도 많았지만 공로가 컸다는 말을 귀 동냥으로 얻어 들을수가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북한군 특수부대 지휘관들 사이에서는 광주에 특수부대가 침투 했었다는 말이 공공연한 비밀로 나 돌았습니다.
최근에는 북한군 4군단 70정찰대대 전투원으로 복무했던 이덕선씨로부터 당시 정찰국 소속 정찰대대들의 광주 침투 상황에 대해서 비교적 상세한 얘기를 들을수가 있었습니다.
이덕선(가명)씨에 따르면 광주봉기 시 2군단 정찰대대를 모토로 하고 각 특수부대들에서 선발한 최정예 전투원 1개 대대가 해상을 통해 남파됐으며 그중 3분의 2가 회생되고 나머지 인원이 귀대 했다고 합니다.
이덕선씨가 알고있는 광주봉기 침투자는 조장이였던 4군단 70정찰대대 상좌 황종인, 부조장이였던 4군단 33사단 중좌, 조원으로 침투했던 4군단 정찰대대 작전집체조의 홍씨성을 가진 참모였다고 합니다.
통상 북한 당국은 남파돼서 임무를 수행하고 귀대하거나 임무수행 중 사망한 공작원 또는 전투원에게 공화국영웅칭호와 함께 각종 훈장을 수여하는데 그 수는 1년에 불과 10손가락안에 꼽히는 정도 였습니다.
이덕선씨에 따르면 80년에 2군단 75정찰대대에서만도 41명의 공화국 영웅이 배출됐고 타 부대들에서 21명 도합 62명의 영웅이 나왔다고 합니다. 북한의 경우 평화시기에는 남파간첩이나 전투원이 아닌 경우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이밖에서 당시에는 국군에 없었던 칼빈이나 M1에 맞은 시신이 수십구라든가, 봉기자들이 정부군의 탱크와 장갑차를 탈취해 진압군을 공격했다든가,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시신이 있는 등 아직 밝혀지지 않은 문제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북한에서의 체험과 이상의 근거들만 가지고도 저는 광주민주항쟁에는 분명히 북한군이 개입했다고 확신합니다.
대남적화통일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억울한 영령들이 신성한 민주시위를 유혈 폭동으로 몰아간 김일성과 같은 백정의 제물로 바쳤을지도 모르는 5.18광주민주화 영령들에게 심심한 애도의 뜻을 표하면서 광주사태의 진실은 반드시 밝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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