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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대통령 당황, 국민은 황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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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치부 댓글 0건 조회 980회 작성일 07-01-31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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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남궁욱 정치부문 기자] 청와대 참모진도 말렸다고 한다. 한시간짜리 연설에서 다루기에는 내용이 너무 방대하다고 말이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은 23일 고집을 꺾지 않은 채 TV생중계 신년연설을 강행했다. 연설 도중 원고를 볼 수 있는 장치(프롬프터)도 쓰지 않은 채였다.

노 대통령은 그간 자타가 공인하는 '말짱'이었다. 토론의 달인이라는 뜻이다. 2002년 후보 시절 한 토론회에서 장인의 좌익활동 경력을 문제삼는 상대의 입을 한 마디로 막아버렸다. "그럼 나더러 사랑하는 아내를 버리란 말입니까."

취임 초 검찰 개혁이 뜻대로 안 되자 '평검사와의 대화'를 자청하기도 했다. "이쯤 되면 막 가자는 거지요?"라는 그의 말은 유행어가 됐다.

23일 '파격 연설'도 이런 말짱의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인가.

'참여정부가 잘한 일이 얼마나 많은지는 일사천리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호기롭게 연설을 시작한 노 대통령은 이내 "적어오긴 했는데 대충 넘어가죠" "말하고 싶은데 시간이 없습니다"를 20여 차례 반복했다. 막판에 "몇 분이나 남았죠?"라고 묻는 노 대통령은 당황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대통령보다 몇 배는 더 당황스러웠던 이들이 있었다. 바로 TV 앞에 앉아 있던 국민이다. 대통령 연설이 10여 분을 넘기면서 신문사에는 전화가 빗발쳤다. 연설 내용이 당혹스럽다는 내용들이었다.

"민생문제는 자신이 만든 게 아니라니… 세상에 그게 대통령이 할 소립니까. 대통령은 무한책임을 져야 하는 것 아닌가요."(흥분해 떠는 목소리로 50대 남성)

연설이 40분쯤 이어지자 형식에 대해서도 황당해하는 전화들이 걸려왔다.

"대통령 신년연설이면 '이런 걸 했고, 저런 걸 하겠다'고 앞으로의 얘기를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왜 자꾸 '넘어가겠다'는 말만 하나요."('평범한 주부'라고 밝힌 40대 여성)

자신감이 지나치면 오만이 된다. 오만한 말은 듣는 이의 마음에 벽을 쌓는다. 듣는 이를 무시하는 것처럼 비치기 때문이다. 듣는 이가 거부감이 생기면 그를 설득하긴 어렵다. 23일 노 대통령의 파격 연설이 국민을 설득하는 데 실패한 건 이 때문이다.

남궁욱 정치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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