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보상은 이성계 태조가 하사한 고유명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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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부보상 댓글 0건 조회 2,099회 작성일 07-01-15 17:40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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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보상(負褓商)이 보부상(褓負商)으로 뒤틀리게 표기되어진 것은 1925년 대한민족의 역사를 왜곡 날조하는데 혈안이 된 조선총독부에서 어용학자들을 앞세워 한반도의 식민지화를 도모하려는 의도적 책략에 기인된 것이다.
조선왕조의 이성계(李成桂) 태조가 고조선 때부터 존속해 오던 등짐장수(負商)들을 추스려서 중상주의정책(重商主義政策)을 실현하기 위하여 행상(行商)들의 대표자인 백달원(白達元)에게 하사한 옥도장(玉圖章)에 유아부보상지인장(唯我負褓商之印章)이라고 분명히 새겨져 있는 점을 비롯하여통상아문진정서(通商衙門陳情書 1883) 통상아문대민행정처리문(通商衙門對民行政處理文 1883) 군국아문행정처리문(軍國衙門行政處理文 1883) 혜상공국관문등서책(惠商公局關文謄書冊 1883) 혜상공국감결(惠商公局甘結 1883) 혜상공국절목(惠商公局節目 1883) 판하상리국서문(判下商理局序文 1885) 판하상리국절목(判下商理局節目 1885) 상무사장정(商務社章程 1899) 등에 부상보상(負商褓商) 부보양사(負褓兩社) 부보휼보(負褓恤保) 좌우상(左右商) 부보양상(負褓兩商) 부보상(負褓商) 좌우사(左右社) 등의 분명한 용어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부보상의 사무소인 임방(任房)이 상무사(商務社)로 개칭된 이후에도 부상(負商)을 좌사(左社)라 부르고 보상(褓商)을 우사(右社)라고 불렀으며
특히 이 둘을 합한 좌우양상(左右兩商)을 좌우사(左右社)라고 명칭함으로써 부보상(負褓商)과 좌우사(左右社)를 일치시켰던 점을 들 수 있다.
2. 부보상의 명칭이 하사된 사연
1) 李成桂 將軍의 受惠
고려왕조 이성계(1335~1408) 장군이 30세인 1364년에 여진족(女眞族)과 교전할 때 위급한 상황을 지나가던 행상(行商)인 백달원(白達元) (白兎將軍達元先生神位 : 충남 덕산면 사무소에 설치된 부보상유품 보관소 백달원의 위패)이 구출해 주었다.
고려왕조 이성계 장군이 46세인 1380년 전라북도 남원군 운봉읍의 황산대첩(荒山大捷)에서 왜장 아지발도(阿只拔都 : 阿其拔都)와의 격전 후 왼쪽 다리의 화살흔적으로 낭자한 유혈을 백달원(白達元)의 부하가 목화(木花) 솜으로 지혈 응급 치료하여 주었다.
1392년 7월 17일 공양왕(恭讓王)의 선양(禪讓)으로 개성(開城)의 수창궁(壽昌宮)에서 이성계 태조가 신진사대부(新進士大夫) 세력의 추대를 받아 고려왕(高麗王)으로 즉위하였다.
1393년 2월 15일 고려의 국호를 조선(朝鮮)으로 개정(改定)하였다.
1392년 즉위 직후 조고(祖考)에 제사를 지내고 선대(先代)의 명복을 기원하는 동시에 스승인 무학국사(無學國師:朴自超)의 은혜를 보답하기 위하여 함경남도 안변군 문산면 설봉산에 석왕사(釋王寺)를 중건할 때 백달원(白達元)이 이태조의 효성심(孝誠心)과 사은심(師恩心)에 크게 감복한 나머지 청년부상(靑年負商) 80명을 인솔하여 강원도의 삼척에서 함경남도 안변까지 오백나한(五百羅漢)의 불체를 운반해 주었다.
2) 李成桂 太祖의 報恩 : 人間的 情感 이태조가 석왕사 건립을 완공한 후 그 동안 입은 은혜에게 보답하기 위하여 백달원(白達元)을 초치하고 간절한 소원(所願) 한 가지를 하문하였다.
백달원은 자신의 부귀영화 보다 부평초 행상(行商)들의 보호 지원을 주청하였다.
이에 이성계 태조는
① 개성의 발가산(發佳山)에 부보상 본부인 임방(任房)을 설치 제공하고
② 木器 土器 水鐵 소금(鹽) 어물(魚)의 5종을 전매특허(專賣特許)하였으며
③ 임방의 공사(公事)를 증빙하고 관아의 포달을 물리칠 수 있도록 유아부보상지인장(唯我負褓商之印章)이라고 새겨진 직인용(職印用) 옥도장(玉圖章)을 하사하였다.
따라서 부보상(負褓商)은 이성계 태조가 하사한 고유명사(固有名詞)이다.
3) 李成桂 太祖의 重商主義政策 이성계 태조가 부보상을 보호 육성한 정책은 중상주의정책(重商主義政策)이다.
이 정책은 이태조를 보좌한 최측근 정책참모인 정도전(鄭道傳)이 경제통(經濟通)이라는 점에 기인된다.
정도전은 경제문감(經濟文鑑)을 저술하여 임금에게 올려 바친 일이 있다.이태조가 중국의 역대 왕조역사에서 중상주의정책을 실시한 왕조는 흥성장구(興盛長久)하였고 억상주의정책(抑商主義政策) 경상주의정책(輕商主義政策)을 실시한 왕조는 쇠락단명(衰落短命)한 역사적 사실을 통찰한 것이다.부보상의 정책적 지원 육성은 군수품보급 전쟁비용조달 등의 국가안보(國家安保)에 직결되고 있기 때문이다.
3. 부보상이 보부상으로 둔갑된 곡절
1) 일본의 앙큼한 식민정책
부보상(負褓商)의 용어가 보부상(褓負商)으로 왜곡 둔갑된 연유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사농공상의 일본식 서열개념으로 조선왕조의 중상정책을 폄하(貶下)하기 위한 역사왜곡과 식민정책을 합리화시키기 위하여 일제에 최후까지 반항한 부보상의 민족정신을 말살하려는 술책에 기인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1910년 일한병탄(日韓倂呑) 이후 일제의 식민통치가 극성을 부리던 시기인 1925년 조선총독부 총독관방(總督官房) 문서과(文書課)에서 발행한 <朝鮮人의 商業, 善生永助 著>이라는 저서의 제2장 제3절 제2항인 78쪽에서 처음으로 보부상(褓負商)이라는 용어가 대두(擡頭)되었기 때문이다.문장의 내용에서는 이성계 태조가 부보상(負褓商)이라는 명칭을 부여(附與)했다면서 항목의 제목에는 보부상(褓負商)으로 기록하였던 것이다.
또한 1929년 간특한 조선총독부 총무과(總務課)에서 발행한 <朝鮮의 市場經濟, 善生永助 著>라는 저서의 제5장 제2절 시장행상(市場行商 : 목차)을 본문에서는 지방행상(地方行商 280쪽)으로 변경하고 민간(民間)에서는 부보상(負褓商)으로 부른다고 기록하면서 소제목으로 보부상(褓負商)을 달았다.이처럼 일본제국의 어용학자를 이용한 조선총독부에서 처음으로 <보부상(褓負商)>이라고 슬쩍 표기한 것을 시발점으로 삼아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때까지 굳이 보부상(褓負商)으로 표기된 논저들이 간혹 나타나기 시작했던 점을 각별히 주목해야 한다.
조선총독부가 우리 나라와 민족정기를 말살하려는 식민정책을 악독하게 추진한 총본부(總本部)이었음을 우리는 절대로 망각할 수 없다.이러한 조선총독부에서 발행된 책자가 우리 나라와 민족정신을 긍정적으로 예찬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민간출판사인 대등각(大 閣)에서 1928년에 발행한 <조선경제사(朝鮮經濟史, 猪谷善一 著, 178쪽>와 계명사(鷄鳴社)에서 1931년에 발행한 <조선잡기(朝鮮雜記, 菊池謙讓 著, 147쪽>에는 양심적인 학자들에 의하여 부보상(負褓商)으로 명백히 등재되어 있다.
한편 일본제국주의자들은 1895년 조선왕조의 고종황제 때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살(弑殺 1895)하였고 알파벳의 국제적 표기순서가 Japan보다 앞섰다는 이유로 Corea를 Korea로 변경시켰다.
또한 그들은 우리 조상들이 대대로 정붙여 살던 지명(地名)을 뒤틀어 놓았고 창씨개명(創氏改名 1940)으로 우리 선조들의 성씨(姓氏)조차 바꾸었으며 우리 한국의 지맥(地脈)을 끊으려고 전국 곳곳의 명산(名山)에 쇠말뚝을 박아 놓았다.
하늘에서 내려다 보면 왜정 때 지어진 경무대의 집모양이 大의 글자모형이고 한 동안 우리의 중앙청으로 사용되었던 지금은 헐린 국립중앙박물관의 조선총독부 건물이 日의 글자모형이며 현재 서울시청의 건물이 本의 글자모형으로서 大日本(대일본)의 글자모형이다.
지금도 일본은 우리 한민족의 역사를 왜곡 변조하는데 골몰하고 동해의 독도영유권을 주장하는 등 간교한 철면피 행동을 서슴치 않고 있다.
2) 일제의 이성계태조 重商政策에 대한 모멸
일제는 이태조의 부보상 육성에 의한 중상주의정책을 왜곡 폄하시키고
일본의 고정관념인 서열적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의식에 입각하여 이태조와 부보상의 밀착관계를 저속화시켜서 조선왕조의 권위(權威)를 날조 실추시키려는 흉계를 견지하고 있었다.일제가 말하는 사농공상(士農工商)에서의 사(士)는 선비(文士)가 아니고 무사(武士)를 의미한다.
3) 이태조의 부보상 명칭하사에 대한 고의적 폄하 왜곡
부보상은 부상(負商:男)과 보상(褓商:女)의 합성어(合成語)이다.본래 사람의 초기생활 수준에서는 식생활(食生活)에 관련된 용품을 판매하는 부상(負商)의 활동이 먼저 발생되었고 그 다음 단계로 점차 생활수준이 향상되면 의생활(衣生活)에 관련된 문화용품을 판매하는 보상(褓商)의 활동이 순차적으로 요구되게 마련이다.
부상(負商)은 물건을 지게(支械)에 지고 팔러 다니던 남자행상(男子行商 : 등 짐장수)이고 보상(褓商)은 물건을 보자기(褓: 布)에 싸서 머리에 이거나 등에 지고 팔러 다니던 여자행상(女子行商 : 봇짐장수)을 말한다.조선총독부는 부보상의 용어를 남존여비(男尊女卑)의 관념으로 왜곡시켜서 은연중 가족이간(家族離間) 여성해방(女性解放)으로 연결지어서 우리 민족자체의 내부분란을 부채질한 것이다.이에 조선총독부는 어용학자를 동원하여 부보상(負褓商)을 보부상(褓負商)의 명칭으로 둔갑시켜서 멀쩡한 생선에 가시를 박고 독(毒)을 묻힌 것이다.
4. 역사왜곡에 따른 식민사관 잔재의 소탕
1877년에 설립된 동경제국대학에서 1887년에 개설한 동양역사학과의 교수들이 사사건건 한반도의 역사를 왜곡시킨 날조공들이다.사농공상(士農工商)의 용어가 신분의 서열개념인 양 착각하고 상업과 상인이 까닭없이 폄하되는 일도 마찬가지로 식민사관(植民史觀)의 잔재이다. 일본의 한반도침략을 합리화시키려는 앙큼한 식민통치사관(植民統治史觀)의 소산이다.
옛날 우리 조선왕조에서 사용된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용어는 신분이나 직업의 서열 개념이 아니었고 사민주의사상(四民主義思想 : 士農工商)에서 발효된 등권적 생업개념(生業槪念)으로서 임금과 노비를 제외한 모든 백성(百姓)의 대명사이었다.
동서고금을 통하여 중상주의정책(重商主義政策)을 실시한 국가는 오래 번성하였음을 상기해야 하겠다.
5. 負褓商의 誡命
특히 부상(負商)들은 동가식(東家食) 서가숙(西家宿)하는 사고무친(四顧無親)의 부평초 신세이면서도 동병상련(同病相憐) 유무상통(有無相通) 간담상조(肝膽相照) 환란상구(患難相救)하고 국민의 생활필수품인 5가지 물품(목기 토기 수철 소금 건어물)을 유통시켜서 생활수준을 배달하면서 이성계 태조가 내려주신 팔자칙교(八字勅敎 : 病則救療 死則埋葬)를 준수했던 것이다.
그들이 품속에 지니고 다니던 채장(신분증)의 앞면에는 소속임방과 성명이 기재되어 있고 뒷면에는 ① 물망언(勿妄言) ② 물패행(勿悖行) ③ 물음란(勿淫亂) ④ 물도적(勿盜賊)의 4대 계명(誡命)이 적혀 있어 행실의 도덕적 기틀로 삼고 있었다.
특히 물망언(勿妄言)은 재물을 들이지 않고 남에게 베풀 수 있는 일곱가지 보시(布施 : 無財七施) 중의 하나인 언시(言施)에 입각하여 불신(不信)과 거리감(距離感)을 좁히는 첩경(捷徑:지름길)이었다.
이러한 부보상의 계명은 향약(鄕約)의 4대 강령(綱領)인 ① 덕업상권(德業相勸) ② 과실상규(過失相規) ③ 예속상교(禮俗相交) ④ 환난상휼(患難相恤)을 바탕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한국상인의 전통의식 속에 살아 있는 부보상(負褓商)의 행실(行實)은 참으로 숭고한 상인정신을 갖추고 있었던 본보기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다고 판단된다.
6. 부보상의 정신구조
1) 충의정신(忠義精神) : 임진왜란(1592∼1598) 병자호란(1636∼1637)
2) 신의정신(信義精神) : 형제정의(兄弟情誼) 환난상구(患難相救)
3) 도의정신(道義精神) : 물망언 물패행 물음란 물도적 <예의>
4) 단결정신(團結精神) : 자치율법 사발통문
7. 부보상의 광역활동
1) 국권수호활동 : 국역전역 상병(商兵) 암행어사보조 황국협회
2) 동향파악활동 : 민심동향 치안동향 적진동향 시장동향
3) 세무활동 : 장세징수(場稅徵收) 납세의무
4) 통신활동 : 국가통신 사설통신(私設通信) 소식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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