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한국사회의 새로운 패러다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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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21세기 사회 댓글 0건 조회 2,263회 작성일 06-10-30 08:58본문
21세기 한국사회의 새로운 패러다임
이윤갑(계명대 교수, 역사학)
한국사회의 기존의 발전모델은 근본적으로는 생존을 위해, 나아가 보다 나은 생존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그 생존이란 개인적 생존과 동시에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생존을 의미한다. 생존을 위한 발전모델은 근대 이후만 보더라도 여러 가지가 기획되었다. 철학사상적으로 대별하면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와 자연주의가 있었고, 사회발전단계로 대별하면 근대사회와 산업사회와 정보화사회로 나뉜다.
한국사회로 말하자면 자유주의와 산업사회가 주류적 발전모델 내지 패러다임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자유주의와 산업사회는 개체 및 사회의 생존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른바 과학 혹은 기술로 불리는 도구적 이성을 최대한 이용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여기에서는 인간의 욕망을 추구하는 활동이 긍정되며 최대한으로 허용된다. 사회 성원 모두에게 그 욕망을 추구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자유주의 모델의 핵심이다. 물론 현실에서는 사회 성원 각자가 경쟁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게 되기 때문에 상호 충돌이 생겨 자유를 누리는 폭이 계급, 계층별로 차별이 발생하지만. 이러한 활동이 도구적 이성(과학·기술)을 이용해 전개되어 질 때 산업사회, 즉 자본주의적 산업사회가 형성된다.
여하튼 한국사회는 개개인이 도구적 이성이나 합리를 최대한 이용하여 생존적 욕구에서 비롯되는 각자의 욕망을 최대한 추구할 수 있게 보장하면서 그에 합치하는 사회체제를 형성하고 발달시켜 왔다고 할 수 있다. 그 사회체제는 기본적으로 공리주의(功利主義) 체제로 분류될 수 있다. 공리주의 체제란 최대다수에게 최대의 행복을 보장하는 사회체제이다. 논자에 따라서는 한국사회가 공리주의의 이념에도 못 미치는 자기전개과정을 거쳐왔다고 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다양한 자유민주주의 체제나 사회주의 체제 모두를 공리주의 체제에 속한다고 보아야 할 것을 생각한다. 공리주의 체제는 경쟁적으로 욕망을 추구하는 개인들이 그로 인해 공멸하지 않도록 상호 타협적으로 형성하는 사회체제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추구할 뿐 모두에게 균등한 행복을 보장할 수는 없다. 공멸에 이르지 않는 적정한 세력관계가 이 체제의 본질이며, 따라서 그 형태나 내용은 서로 충돌하는 이해를 지닌 집단들의 세력관계가 어떻게 변동하느냐에 따라 다양할 수 있다.
공리주의 체제에서는 다수의 이익인 공익(公益) 혹은 공공선(公共善)이 있지만,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타당할 수 있는 공통선(共通善)은 현실적 가치를 지니기 어렵다. 보편적 합리보다는 특수적 합리, 개별적 혹은 당파적 합리가 더 우선한다. 욕망의 추구 자체가 무차별적으로 긍정되고 용인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상대화된다. 결국 보다 큰 세력을 이루는 집단이 추구하는 가치가 지배적 가치로 행세하게 되고, 이것에 의해 여타 집단의 가치가 차별화 된다. 여기에 대한 반발이나 비판이 다원주의 혹은 조합주의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또한 공리주의 체제의 세력균형을 다극적 혹은 다중심적으로 변화시킨다는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는 못한다.
현대 한국사회의 발전모델이었던 자유주의 혹은 자유주의적 개인주의는 자기자신을 중심에 놓고 그 밖의 타인이나 자연을 오로지 자신의 목적을 위한 대상적 연관하에서만 파악하는 한계를 지닌다. 이 자폐적 세계관은 세계와의 보편적 상호연관성을 부정한다. 인간 그 자체는 세계와 불가분의 관계로 동시적, 등가적, 전방위적으로 연관하지만, 자유주의적 개인주의를 추구하는 인간의 기능이나 행위는 그와는 무관하게 자기중심적인 것을 지향하는 모순을 야기한다. 이 모순이 한국사회가 맞고 있는 인간적, 사회적 위기의 근원이다.
한국의 사회체제는 사유(私有) 주체인 각 개인들이 욕구충족을 위해서 형성한 것이다. 개인들은 상호 경쟁과 대립 속에서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밖에 없고, 따라서 그 체제는 근본적으로 위계적이고 차별적이며 불평등하다. 그렇게 사유 주체인 개개인들이 스스로의 권리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만든 것들이 국가기구를 위시한 정치조직들, 정당 및 사회단체들이다. 따라서 이 사회체제는 각자가 자신의 욕망 충족을 위해서 상대를 이용하기 위해 만든 '욕구의 체계'에 지나지 않는다. 국가주의나 민족주의가 표방되기도 했지만 그 내실은 사회를 철저히 인간의 편의와 욕망에 부수하는 것으로 간주할 뿐이었다. 사회적 인권 또한 사유(私有) 주체들의 생명, 재산, 자유에 대한 권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기존의 민주화운동이나 사회개혁은 차별과 불평등을 결과할 수밖에 없는 이 권리들을 공평하게 나누어 갖는 것을 자기 목표로 삼았다.
민주화와 개혁으로도 전혀 해결의 기미를 찾을 수 없는 한국사회-비단 한국사회만이 아니라 현대사회 전반-의 위기의 근원은 도구적 이성- 과학문명 -의 비약적 발달과 그것을 감당할 수 없는 인간의 사회성 사이의 괴리 혹은 충돌에 있다. 말하자면 인간은 자연성의 개발이 사회성의 개발을 지나치게 앞질러 나갔고 그 괴리가 현대문명사회의 위기를 초래한 것이다. 물론 그 괴리를 구조적 혹은 제도적 장치를 통해 보완하려는 시도가 다양하게 이루어진 바 있다. 민중운동이나 민주화운동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그러나 구조나 제도는 인간의 행위 혹은 실천을 통해 작동될 수 있을 뿐이다. 그 구조나 제도를 작동시키는 인간의 행위가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의 한계를 극복할 수 없었고, 결국 관료주의의 병폐를 벗어나기 어려웠다.
한국사회의 위기의 심각성은 '자폐적' 자유주의 혹은 이기주의가 목적 추구의 수단으로 구사되는 도구적 이성의 야만성과 파괴력이 마침내 세계화 시대를 맞아 신자유주의로 치달으면서 인간 생존의 바탕이 되는 세계-사회 및 생태계-를 해체시키는 수준으로까지 증폭되고 있다는 점에 있다.
따라서 한국사회의 위기를 해결할 새로운 발전모델은 인간의 사회적 이성의 개발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달리 말해 인간의 도구적 이성의 발달에 상응하는 사회성의 개발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러한 사회성의 개발을, 달리 말해 인간의 세계성, 세계적 존재로서의 자각을 억압해 온 강력한 기제들은 다름 아닌 자폐적인 인간 욕망의 근대적 현상물이라 할 사유권(私有權), 사유제(私有制), 사유의식(私有意識) 등이다. 사회성 개발이란 이를 극복하고 인간 존재의 본연의 세계성을 인식하고, 세계성을 발현하는 것이다. 인간을 포함해 모든 존재는 그 자체가 세계와의 합법칙적 연관하에 있는 존재이고, 그러한 질서체계를 벗어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이 스스로 근대의 자폐적 세계관을 극복하고 법칙적 상호연관을 인식하며 나아가서 법칙적 연관을 창출하는 것이 사회성의 개발 즉 '인간의 사회화'이다.
이런 사회성을 우주적으로 구현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인간중심주의가 아니라 인본주의를 말할 수 있다. 인본주의(人本主義)에서 인간은 타 존재를 대상화하거나 도구화하지 않고 등가적이고 상호중심적인 - 따라서 다중심적인 - 목적으로 마주한다. 인본주의는 인간/사회/자연의 문제를 총체적으로 고민하고 동시적 등가적으로 관계할 때 확립된다. 인본주의에서 인간의 과학은 자연의 법칙과 상충하지 않으면서 상보적으로 맞물리는 법칙적 발전이 가능하게 된다.
'인간의 사회화' 혹은 '인간의 세계화'에 기반한 인본주의에서 우리는 새로운 사회체계를 전망할 수 있다. 이 새로운 체계는 도구적 이성에 의한 문명과 사회성에 의한 문화의 네트워크를 수레의 두 바퀴처럼 통합하고 입체화한 것이다. 인본주의에 기반하는 새로운 사회체계는 인간과 인간, 자연과 사회가 상호자주적·등가적으로 결합하고 소통하는 다중심적이면서도 통일적인 체계화 공영(共營) 사회이다. 체계화란 존재의 보편적인 상호연관이라 할 인간 상호간의 합법칙적 연관이자 생활세계의 합법칙적인 구성이며, 공영이란 세계를 구성하는 존재들이 상호 자주적으로 같이 세계를 경영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경영능력은 본위력을 회복한 존재들의 자기운동성이 체계의 통일적 운동력으로 발현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공리주의의 사회운영기제로서의 국가를 위시한 각종의 사회조직은 인간 스스로가 상호자주적 해결능력을 포기하여 실질적 민주성을 양도하고 위임할 경우에 등장한다. 인간의 상호자주적·등가적 관계가 무너진 그 틈새에서 생겨난 모순적 잉여가 사회조직의 실체이다. 사회조직은 공익의 실현을 위해 출현한다는 명분을 가지지만 일단 조직 - 그 최상부에 국가권력이라는 것이 있고-이 발생하면 그것은 곧바로 인간으로부터 자립하게 되고 역으로 인간을 지배하게 된다. 결국 인간은 스스로가 만든 조직에 구속되면서 사회성을 상실하고 만다.
이 조직이라는 사회적 잉여물은 인간 스스로가 상호등가적·자주적 결합체계, 삶의 소통체계를 구축하게 되면 소멸된다. 존재의 보편적 상호연관에 다름 아닌 인간상호간의 합법칙적 연관체계가 바로 사회가 되는 것일 뿐 그 위에 군림하는 별개의 사회는 없게 되는 것이다.
인본주의 즉 '인간의 사회화'를 이루고 체계화 공영사회를 건립하는 보다 구체적인 방도는 무엇인가? 토론자는 우리의 현실인 마을(현장)과 사람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이란 각자 스스로의 생존을 추구하는 존재이자 동시에 그 바탕인 사회를 이루는 구성원이며, 마을이란 공동의 생존이 이루어지는 사회적 공간 혹은 생활세계라 할 수 있다. 한국사회의 마을과 사람은 그 자체가 문제라 할 만큼 많은 모순과 불합리와 갈등·대립을 안고 있다. 그 모순과 갈등은 자폐적 사회관 및 그것과 불가분한 관계에 있는 공리주의적 사회체제의 불합리가 현상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인간의 사회화'는 이 모순과 갈등을 철학적으로 고민하고 성찰하는 공동논의의 장을 마련하는 데서 시작될 수 있다. 우리는 그간 사회개혁이나 민주화의 이름으로 이 모순과 갈등을 사회적 자원의 배분방식을 시정하는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시도를 되풀이하였다. 자원배분에서 소외당했던 이들에게 보다 많은 자원을 배분하는 구조적·제도적 개혁을 이룩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른바 '사회의 인간화'라 할 이러한 개혁도 결국 그 내용은 동원 가능한 세력과 영향력의 크기에 의해 결정되었다. 보다 심각한 문제는 문제 해결의 주체로 나선 계급·계층 혹은 사회집단이 비록 소외되고 억눌린 약자였지만 그들의 사회성이 강자의 사회성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았고, 문제의 해결을 추구하는 대립과정에서 그 부정적 속성 또한 현재화되어 왔다. 그로 인해 '사회의 인간화'라는 합리는 실종되고 개혁은 결국 세력관계에 비례해 배분율을 절충하는 것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그것은 모순의 미봉적이고 잠정적인 조절이었지 해결이 아니었다.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통해 당사자들의 합리적인 사회성이 개발되기는커녕 이른바 권익이라는 미명하에 모든 것이 상대화되면서 자폐적인 욕망의 추구 방식만 보다 복잡하고 첨예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다소 처지가 나아지긴 했지만 대중의 소외와 대상화와 억압상태는 본질적으로 여전히 개선되지 못했다.
대안적 사회체계는 자폐적 자유주의의 삶의 방식과 야만적 공리주의 사회체제로부터 그의 합리적, 자율적 생활세계를 유린당하고 고통받고 있는 대중들의 생존욕구와 생존활동에서 그 현실적 추진동력을 확보한다. 물론 대중의 즉자적 욕구나 저항이 바로 그 동력이 되지는 못한다. 대중들 또한 자폐적인 자유의의의 삶의 방식에 매몰되어 있으며, 그들의 즉자적 욕구나 저항 또한 이 방식에서 비롯되고 있기 때문이다. 현실의 삶을 고통스러워하는 대중이 자신의 삶의 방식과 생활세계를 지배하는 자폐성과 불합리를 철학적으로 성찰할 수 있을 때 존재와 세계의 보편적 연관성을 회복하는 진정한 인본주의적 나섬의 문화의 단초가 열린다. 여기에 이르러 대중은 비로소 체계화 공영사회를 건립할 역사적 동력으로서의 자기운동성을 확보하게 된다. 그것은 달리 말하면 보편적 상호연관으로 합리적 생활세계를 구성하는 상호등가적. 상호자주적이면서 동시에 상호침투적이고 통일적인 소통력이자 사회구성력이다.
사람과 마을(현장)의 모순과 불합리를 철학적으로 성찰하는 과정을 통해 '인간의 사회화'를 이루는 이러한 활동을 토론자는 우리학문운동이라 명명한다. 대안적 사회체계는 이러한 우리학문운동을 통해 비로소 전망될 수 있다.
오늘 우리의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다양한 사회적 활동들은 대안적으로 건립될 합리적 생활세계에서도 역시 불가결한 요소로 자리할 것이다. 그러나 그 요소들은 지금과는 달리 생활세계의 합리적 구조에 합치하는 기능을 갖게 될 것이다. 우리학문운동에 기반한 체계화운동은 사회를 구성하는 각 요소와 부분들이 그 본래적 기능성을 회복하면서 합리적 상호연관을 이루어 통일적인 생활세계를 구성·복원해 가는 것이다. 체계는 그 자체가 역동적이고 생명력을 갖는다. 기술적 의미의 네트워크와는 구분되는 것도 바로 그 점 때문이다. 체계는 외적, 내적 조건에 동시적으로 상응하는 탄력적인 장이지 고정되거나 실체화되어 있는 3차원의 공간개념은 아니다. 외적, 내적 변화에 연동할 뿐 아니라 그 변화에 대응해서 인간 스스로가 법칙적으로 창출해 가는 사회, 따라서 무조직적·무실체적 사회이며 인간을 구속하고 인간 위에 군림하는 사회가 아니라 인간 스스로의 법칙적 창출로서의 사회이다.
체계화 사회로의 진전을 위해서는 우리 사회의 각 부문운동들이 마을과 사람의 문제를 등가적, 동시적으로 해결하고자 고민하는 우리학문운동에 기초해 자기 고유한 현장성을 분명히 하고 대중의 실질적인 민주역량, 자치적인 경영능력이 자리잡아 갈 수 있게 하는 것이 당면한 현실적 과제라 생각된다. 토론자는 이러한 거점형성운동을 마을만들기운동으로 부르고자 한다. 마을만들기는 대중이 자치력을 회복해 가는, 실질적 자치의 경영능력이 자리잡아 가는 공간적 의미로서의 거점을, 체계의 단초적 구축이 가능한 사회적 공간을 형성하는 운동이다. 그러한 거점을 전국적으로 형성하고 이를 미래의 수권적 경영을 예비하는, 각자가 그런 정도의 책임있는 단위로 발전시키면서 동시에 이들 간의 협의체적 자치연합을 구성하여 실질적 민주화를 이룩해 가는 도정에서 비로소 대안적 체계에 대한 구체적 전망이 확보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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