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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인사를 경남의 인물로 선정한 경남도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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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푸른창공 댓글 1건 조회 2,035회 작성일 06-07-14 11:06

본문

경남 함양군의 상림공원내에 있는 역사인물공원에 친일인사의
흉상이 건립되어져 함양군의 역사와 민족정기를 흐리고 있습니다.
 
또한 경상남도청에서도 이 인물을 경남의 인물로 선정을 하여 홈페이지에
올려놓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발생해 수차례 항의전화를 했으나 묵묵부답입니다. 
 
하루속히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아 진정 존경의 대상으로 한점 부끄러움이
없는분이 존경의 대상으로 바로서기를 바램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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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암 이병헌의 고향인 경남 함양군에서는 함양군을 빛낸 역사인물로 선정하여 역사인물공원에 흉상까지 건립해 그곳을 찾고있는 수많은 시민들의 존경과 추앙을 받고 있다고 한다. 친일에 대한 의혹과 자료가 남아있는 진암의 흉상 맞은편에는 의병장 문태서장군의 흉상이 위치해 있다고 하니, 하루속히 잘못된 역사는 바로 잡아야 할것 같다. 

진암을 고향이 낳은 大유학자로 존경의 대상으로 추앙하는 시민들도 이제는 진암이 어떠한 활동하였는지 제대로 인식하고 고찰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한다. 

진암 이병헌은 
이병헌은 조선을 통치하는 방법에 대하여 자신이 직접 저술한 對鮮根本政策專在儒敎論(대선근본정답전재유교론)을 조선총독부는 물론이고, 일본정부까지 보내고 찾아가 우리민족을 통치하는 방법에 대하여 주창하였다. 이는 조국과 민족을 배신한 반민족적 매국행위이며, 그어떤 이유로도 변명의 여지가 없을것이다.

이병헌은 또한, 악질 친일파 유림들의 모임인 대동사문회와 교류했으며, 
신성한 독립운동을 소요(騷擾)라 했으며,
독립운동자를 일본인들과 같은 不逞鮮人(부정선인)이 아니면 强盜輩(강도배)라고 생각했으며, 총독부내각을 끼고 활동을 했으며,
일본정부와 총리, 총독부에 수십차례 청원과 건의문을 보냈으며,
몇차례 일본까지 건너가 일본정부를 상대로 청원을 했으며, 
조선 2천만의 공동의 적(適)을 총독부라하고, 정부라하고, 대관(大官)이라 일컬으며 조선공동의 적(適)을 인정했고, 식민지 체제를 인정했으며,
자신의 종교적 욕심을 민족의 자유와 바꾸려 했으며,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3.1만세운동으로 민중이 들불처럼 일어설때도 居喪(거상:두문불출)하며 조국의 독립을 외면했다.

일제가 강제병합후 향교재산을 강제로 국유재산으로 귀속시킨것을 이병헌이 총독부에 혼자 항의하여 환원시켰다고, 친일파 鄭汶鉉(정문현)은 얘기하고 있으며, 현재 그것이 이병헌의 큰 업적처럼 얘기되고 있으나, 1910년~1920년대 조선총독부의 유교정책을 보면, 그것은 큰 업적이 아니라 되려 그가 얼마나 친일행위자였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3.1운동이 일어난후의 향교정책(鄕校政策)의 변화(變化)는 총독부에서 문화통치를 표방하자 유림계에서는 향교재산을 향교에 환부하여 유교진흥에 몰두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요구를 하였다. 그러나 주로 이러한 요구는 「대동사문회(大東斯文會)」등 어용적인 유림단체들에 의해서 주도되었다. 

총독부에서도 이 요구를 받아들여 향교에 대한 정책을 재검토하였다. 총독부 당국은 일단 유림계의 요구를 수용하는 척하면서 총독부 의도에 맞게 새로운 정책안을 마련하였다. 우선 총독부에서는 1910년 4월의 학부령(學部令) 2호로 발표되었던 향교재산관리규정을 폐지하고 1920년 6월 29일자로 「향교재산관리규칙(鄕校財産管理規則)」을 발표하였다. 

그것은 "향교재산(鄕校財産)은 부윤(府尹), 군수(郡守), 도사(島司)가 관리(管理)하며 향교재산(鄕校財産)을 매각(賣却), 양여(讓與), 교환(交換) 또는 담보(擔保)로 제공(提供)할 때는 조선총독(朝鮮總督)의 인가(認可)를 받을 것과 "향교재산(鄕校財産)의 수입(收入)은 」차(此)를 문묘(文廟)의·비용(費用) 기타(其他) 교화사업(敎化事業)에 사용(使用)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이어 총독부는 「향교재산관리(鄕校財産管理) 규칙개정(規則改正)에 관(關)한 건(件)」을 발하고 이를 각도 지사(知事), 부윤(府尹), 군수(郡守), 도사(島司) 등에게 총독훈령을 내려보냈는데, 규칙 개정의 본취지가 3·1운동과 같은 민족운동을 저지하고 총독부 식민지통치에 순응하도록 하는 지방교화진흥에 있음을 확실히 한것이었다

상해 임시정부에는 이병헌을 일컬어 민원식(閔元植) (친일파 거물 언론인)과 같은 인물이라는 밀고까지 있었으니, 일본정부와 총독부에 대한 이병헌의 행위가 얼마나 반민족적이었나를 여실히 보여주는 한대목이 아닐수 없다. 

학계에서는 진암이 유학자로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려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지 모르나, 당시의 국가와 민족이 처한 시대적 상황과 배경에 빗대어 보고, 그의 활동영역과 활동사항들을 보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이는 분명 재조명 해야될 필요성이 반드시 있다. 

진암의 친일행위는 역사적 자료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시점에서, 인물에 대한 평가를 종교학적 측면에 치우쳐 하였고, 인물공원에 흉상이 건립되어, 시민들의 존경과 추앙의 대상으로 인식되어 진다는 것은 씁쓸하다 못해 탄식이 우러나오게 한다.  

역사바로 세우기란 국민들에게 역사적사실을 바탕으로 역사에 대한 올바른 생각과 가치관을 성립케 하는것이라고 생각한다. 음지는 가리고 양지만 들추어내서도 안되고, 반대의 상황이 되서도 결코 안될것이다.
  
역사는 후대까지 영원히 남아 옳지않은 부분에 대해서는 반드시 재조명 받게 할것이다.

민족을 배신하고 반민족 행위를 저질렀던 사람들에 대해서는 반드시 그에 응당한, 역사의 준엄한 심판이 있어야 할것이다.

아래는 우리의 민족신문인 독립신문과 한국독립운동사 자료에 기재되어있는 내용으로 독립기념관 홈페이지를 가면 누구나 원문을 다운받을수 있다. 이병헌은 이미 임시정부로 부터 친일파로 낙인찍혔던 인물이다.

경남도청과 함양군에서는 이병헌에 대한 인물평가를 재평가할것을 요구하며,
즉각 흉상을 철거하고, 경남의 인물선정을 철회하여  경삼남도와 함양군의 역사와 
민족정기를 바로세우길 촉구한다. 

그리고 이병헌에대한 인물연구와 평가를 담당했던 위원회는 시민앞에 석고대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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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 獨立新聞 大韓民國 二年(一九二○) 六月一日 二面

李炳憲(이병헌) 退去(퇴거)

屢日(루일) 審問中(심문중)에 在(재)하던 李炳憲(이병헌)에 對(대)하여 去二十六日 下午(거이십육일 하오)에 當局(당국)에서 柳(유) 警務局參事(경무국참사) 曹警護員(조경보원)을 特派(특파)하여 費用(비용)을 制限(제한)하여 封印(봉인)이던 携帶金(휴대금)을 開封(개봉)하여 주고 同時(동시)에 速(속)히 上海退去(상해퇴거)를 命(명)하였던 바 李(이)는 警務局長(경무국장)에게 金貨 一百二十元(금화일백이십원)을 送(송)하여 其中(기중) 百元(백원)은 政府(정부)에 獻納(헌납)하고 二十元(이십원)은 獨立新聞社(독립신문사)에 義助(의조)하여 달라고 懇請(간청)하였으나 警務局長(경무국장)은 政府(정부)에서는 當然(당연)히 拒絶(거절)하겠고 獨立新聞社(독립신문사)는 當局(당국)의 責任(책임)에 不在(부재)하다하고 全部(전부)를 退還(퇴환)하였는데 當人(당인)은 去二十七日 午前八時에 津浦行 列車로 當地(거 이십칠일 오전8시에 진포행 열차로 당지)를 出發(출발)하다

위 내용은 한국독립운동사 자료2(임정편Ⅱ)   二. 大韓民國臨時政府 活動   2. 國務會議 및 各部署別活動    30. 李炳憲 上海退去의 件으로 기재가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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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 獨立新聞 大韓民國 二年(一九二○) 五月二十七日 三面

孔子(공자)를 尊尙(존상)키 爲(위)하야는 敵(적)의 奴隷(노예)를 甘作(감작:만족하며 일하는)하는 儒敎中毒者(유교중독자) 李炳憲(이병헌)의 行(행)

?鬼輩(창귀배)의 集合(집합)인 所謂(소위) 大同斯文會(대동사문회)와 通(통)하고 宗敎(종교)로써 政治的 術策(정치적 술책)에 使用(사용)코져 하다

本報(본보)는 前號(전호)에 寺內(시내), 齋(齊)藤(제등) 等(등)이 儒林中(유림중)의 不良狹雜輩(불량협잡배)를 驅(구)하야 所謂(소위) 大同斯文會(대동사문회)를 組織(조직)케 하고 此(차)를 操縱(조종)하야 怪惡(괴악)한 陰謀(음모)를 策(책)하던 그 一端(일단)이 發露(발각)됨을 報(보)하다, 이제 그 詳情(상정)을 듯건대 昔日(석일) 儒林中(유림중)에 名聲(명성)이 高(고)하던 李炳憲者(이병헌자)가 敵(적)의 蔭下(음하)에셔 儒敎勢力(유교세력)의 擴張(확장)을 期(기)하기 爲(위)하야 孔子(공자)의 肖像(초상)을 得(득)하려고 敵(적)의 旅行券(여행권)을 携(휴)하고 中國(중국)에 來(래)함인대 아직까지 表面(표면)에 나타난 事實(사실)로는 所謂(소위) 大同斯文會(대동사문회)와는 重要(중요)한 陰謀(음모)와 ?契(묵계)가 無(무)한 듯하다, 그러나 그의 心事(심사)로 推測(추측)하면 넉넉히 斯文會(사문회)에 同化(동화)될 可能性(가능성)을 가진 者(자)라, 李(이)의 計略(계략)은 肖像(초상)을 得(득)하야 歸國(귀국)한 後(후) 韓國統治(한국통치)의 根本策(근본답)은 儒敎(유교)에 잇다 하야 儒敎(유교)의 振興(진흥)을 圖(도)하러 함이라, 事(사)가 未遂(미수)에 發覺(발각)됨은 多幸(다행) 千萬(천만)이오 또한 李(이)가 지금 恭順(공순)의 意(의)를 表(표)하고 謹愼中(근신중)이라 하니 今後(금후) 正路(정로)에 悔歸(회귀)할 날이 이슬 줄 아노라

長谷川等(장곡천등)에 書(서)를 致(치)하야 韓國統治(한국통치)의 根本策(근본답)은 儒敎(유교)를 發展(발전)식힘에 잇다고 

儒敎(유교)로 世界統一(세계통일)

李炳憲(이병헌)은 慶尙南道咸陽人(경상남도함양군인)이라, 昔日(석일)에 잇서서는 儒林中(유림중) 자못 名聲(명성)이 高(고)하엿고 白嚴朴先生(백암박선생)과는 親交間(친교간)이라 李(이)는 國恥後(국치후) 累次書(루차서)을 敵政府(적정부), 長谷川(장곡천), 齋(齊)藤(제등) 等(등)에 致(치)하야 耶?敎(야?교) 天道敎(천도교) 等(등)을 撲滅(박멸)하고 儒敎(유교)의 擴張(확장)을 計(계)함으로써 韓國統治(한국통치)의 根本策(근본답)을 삼으려 하다, 只今(지금) 警務局(경무국)에서 留置中(유치중)인 李(이)의 携來(휴래)한 書類中(서류?O), 對鮮根本政策專在儒敎論(대선근본정답전재유교론)이란 것을 보건대

問(문) 倂合時(병합시)의 詔勅中(조칙중)에 東洋平和(동양평화)를 ●維持(유지)한다는 語(어)와 諭告中(유교중)에 儒佛敎(유불교)를 保護(보호)한다는 議(의)는 그 根本政策(근본정답)을 得(득)하엿다 할 것이 안일가

答(답) 廟堂宏謨(묘당굉모)는 임의 根本大計(근본대계)가 立(입)하엿스나 惜乎(석호)라 煌煌(황황)●聖詔(성조)와 申申(신신)한 諭告(유고)가 墨蹟(묵적)이 마르지 못하야 宗敎令(종교령)이 發布(발포)되야 儒敎(유교)가 削除(삭제)되고 鄕校財産管理規則(향교제산관리규칙)이 濫施(남시)되야 聖廟(성묘)의 釋奠(석전)과 修理(수리)가 成說(성설)치 못하게 되엿도다 萬一(만일) 儒林(유림)의 實心(실심)한 捐助(연조)가 안이면 거의 撤廢(철폐)되야스리라 비록 儒敎(유교)를 崇?(숭상?)할지라도 誠意(성의)가 無(무)하면 不可(불가)하거든 하물며 名義(명의)조차 壞(괴)함이리오

問(문) 今回(금회)의 騷擾後(소요후) 廟堂方針(묘당방침)은 그 根本(근본)을 得(득)하엿다 可謂(가위)할가

答(답) 大詔(대조)를 奉讀(봉독)한즉 一視同仁(일시동인), 增進福利(증진부리), 宣布德化等語(선시덕화등어)가 蕩然(탕연)히 仁心仁聞(인심인문)의 可述(가술)할 바 有(유)하니 깁히 救民(구민)의 本旨(본지)를 得(득)하엿으며, 總督(총독)의 諭告(유고)인즉 大詔(대조)의 旨(지)를 紹述(소술)하야 文化二字(문화이자)에 三復致意(삼복치의)하엿으니 本(본)할 바를 아지 못하엿다고 니르지 못하겟고 渡鮮(도선)의 初(초)에 共同墓地改正(공동묘지개정)의 令(령)을 首發(수발)하엿스니 切民(절민)의 要務(요무)라 可謂(가위)할지라

問(문) 今回(금회)의 施設(시설)은 根本政策(근본정답)을 解決(해결)함을 得(득)할가

答(답) 朝鮮文化(조선문화)의 目標(목표)는 오직 儒敎(종교)에 잇다, 儒敎問題(유교문제)가 解決(해결)된 後(후)에야 根本政策(근본정답)이 成立(성립)되리니 此一項(차일항)의 事案(사안)는 엇지 殷落(은락)될는지 알 수 업다 하고 現今(현금)은 日本(일본)의 對鮮文化政治(대선문화정치)의 一轉機(일전기)인대 日本(일본)의 現時儒敎(현시유교)에 對(대)한 策(답)은 三(삼)이 有(유)하나 그 上策(상답)을 得(득)하면 可(가)히 世界(세계)의 盟主(맹주)가 될 거시오 中策(중답)을 得(득)하면 可(가)히 東亞(동아)의 平和(평화)를 니를 거시요 下策(하답)을 得(득)하면 可(가)히 現時(현시)의 狀態(상태)를 保(보)하리라 하고 所謂(소위) 上策(상답)은

?먼져 政府(정부)로서 儒敎(유교)에 注重(주중)하야 支那宋元(지나송원)의 派(파)를 黜(취)하고 至聖時中(지성시중)의 義(의)를 衍(연)하야 斯世(사세)에 造(고)하면 少康(소강)으로붓허 太平(태평)을 致(치)하야 歐美(구미)의 正義人道(정의인도)을 慕(모)하고 能(능)히 實行(실행)치 못하는 者(자)로 하야금 반드시 와서 法(법)을 取(취)하고 靈魂(영혼)을 養(양)케 하리니 精義(정의)로 말마 神미아 明(말미아마 神明)에 入(입)하야 天人(천인)이 感通(감동)하며 生死(생사)에 安樂(안락)하야 各敎(명교)의 天堂(천당)을 身後(신후)에 求(구)하는 者(자)가 居然(거연)히 樂(락)할 바가 吾心(오심)에 잇는 주를 알지니 昔日(석일) 所謂(소위) 天堂極樂(천당극락)이 求(구)치 안이하여도 自然(자연)히 니를 것이라, 是(시)와 如(여)한즉 宗敎政治敎育(종교정치교육)을 勿論(물론)하고 맛당히 世界(세계)의 最優先(최우선)의 地位(지위)을 占(점)하리니 엇지 盟主(맹주)가 안이리오, 이것이 上策(상답)이니라? 하다

孔子(공자)의 肖像(초상)을 得(득)하기 爲(위)하야 中國(중국)에 一(일)을 大同斯文會(대동사문회)에 一(일)을 培山學堂(배산학당)에

李炳憲(이병헌)은 往年中國(왕년중국)에 來(래)하야 康南海(강남해)와 함?? 曲阜(곡부)의 大成殿(대성전)에 拜(배)한 事(사)가 잇슴으로 慶南(경남)의 儒林中(유림중)에는 名聲(명성)이 놉다, 그의 知友(지우) 儒生(유생) 李忠浩(이충호)는 李退溪(이퇴계)의 宗孫(종손)이라, 兩人(양인)은 該地(개지)에 잇는 培山書堂(배산학당)에 孔子(공자)의 肖像(초상)을 奉置(봉치)하고 嶺南儒林(영남유림)의 中心(중심)으로 儒敎(유교)의 發展(발전)에 努力(노력)하려 하야 李炳憲(이병헌)이 金千餘圓(금천여원)을 自家(자가)의 門中(문중)에서 辦出(변출)하야 携(휴)하고 中國(중국)을 向(향)하야 出發(출발)하다, 京城(경성)에 着(착)하야 大同斯文會(대동사문회)의 鄭萬朝(정만조)와 見(견)하?? 鄭(정)은 曰(왈) 임의 孔子(공자)을 尊崇(존숭)할진대 大同斯文會(대동사문회)에 入(입)하야 全鮮(전선)을 爲(위)하야 盡力(진력)하라 함으로 李(이)는 諾(낙)하고 또 鄭(정)의 付託(부탁)으로 孔子肖像二個(공자초상이개)을 求(구)하야 一(일)은 斯文會(사문회)에 보내기을 諾(낙)하다 所謂(소위) 大同斯文會(대동사문회)는 旣報(기보)와 如(여)히 儒林中(유림중)의 가장 不良(불량)하고 腐敗(부패)한 者(자)의 集合(집합)한 者(자)인대 日人大垣(일인대원)이 顧問(고문)이 되고 鄭萬朝(정만조), 李範喆(이범호), 崔承年(최승년), 朴魯學(박노학), 宋之産(송지산) 等(등)이 그 幹部(간부)가 되야 韓日同化(한일동화)를 目的(목적)하고 高等偵探(고등정탐)을 副業(부업)으로 하는 者(자)라

獨立運動者(독립운동자)란 것은 日人(일인)의 所謂(소위) 不逞鮮人(부정선인)이 안이면 强盜輩(강도배)라고 思(사)하다

李炳憲(이병헌)의 自白(자백)

李(이)는 當地(당지)에 來(래)한 後(후) 某某氏(모모씨)와 會談(회담)하는 中(중) 그의 行動(행동)에 疑訝(의아)할 만한 點(점)이 發見(발견)되야 某地(모지)에 留學(유학)하던 學生(학생) 等(등)이 詰問中(힐문중)임을 警務局(경무국)에서 다려다가 事實(사실)을 審問(심문)하다, 그가 警務局(경무국)의 措處(조처)함을 본 뒤의 自白(자백)에

?惶悚(황송)하나 나는 처음 某某學生(모모학생)에게 붓들녀 詰問(힐문)함을 當(당)하다가 여기 와서 또 審問(심문)을 當(당)할 때까지 오직 金錢(금전)을 奪(탈)하려 하는 目的(목적)인 줄 아럿소. 獨立運動者(독립운동자)라 일홈하는 사람들은 모다 日人(일인)의 말과 갓치 不逞鮮人(부정선인)이거나 强盜輩(강도배)인 줄 안 것시오, 이러케 臨時政府(임시정부)가 잇서 公明正大(공명정대)한 處置(처치)을 하시는 줄은 물낫소

하며 此後(차후)로는 政府(정부)의 命令(명령)대로 가라면 가고, 잇스라면 잇고, 모든 일을 식히? 대로 하겟노라 하다?

孔子(공자)의 잇슴을 알고, 檀祖(단조)의 잇슴을 모른다
神聖(신성)한 臨時政府(임시정부)가 잇슴을 알니리라

金警務局長談(김경무국장담)

病(병)으로 入院中(입원중)인 金警務局長(김경무국장)은 語(어)하여 曰(왈)

?儒敎(유교)의 勢力(세력)만 擴張(확장)할 수 잇스면 敵(적)의 아래에 ●도 잇스려 하오, 儒林(유림)의 思想(사상)이 거의 다 이럿소, 孔子(공자) 놉흔 줄만 아오, 나라가 잇는 줄은 몰으오, 偵探(정탐)이오? 그런 일이야 업는 줄 아오, 또 비록 偵探(정탐)이라 할지라도 나는 政府(정부)의 神聖(신성)함을 알녀서 참으로 깨닷도록 하려 하오, 鄭萬朝輩(정만조배)도 이를 그럿케 信任(신임)치는 안니한 듯하오, 그저 이왕 가는 길이니 肖像(초상)이나 하나 더 求(구)하라 한 貌樣(모양)이지오, 그논 只今(지금) 肖像(초상)도 가져 가라면 가져 가고 말라면 말겟다 하오 머리도 까그라면 깍고 말라면 말겟다 하오, 나가서 무엇을 하랴, 엇지하랴 하고 작구 뭇소?

警務局(경무국)에서 留置(유치)한 書類中(서류중)에는 中文(중문)으로 쓴 ?儒敎復原論?(유교복원론) ?宗敎公案?(종교공안) ?儒敎區處論?(유교구처론) ?對鮮根本政策專在儒敎論?(대선근본정답전재유교론)과 李炳憲(이병헌), 鄭文燮(정문섭), 金一濟(김일제), 鄭秉模(정병모), 洪鍾起(홍종기)의 列名(열명)으로 昨年(작년) 五月四日(오월사일) 長谷川(장곡천)에게 致(치)한 書(서)가 有(유)하다, 略(약) 千圓(천원)의 携帶金(휴대금)은 警務局(경무국)에서 封印(봉인)하고 消費(소비)를 禁(금)하엿섯는대 今明間(금명간) 解禁(해금)하리라 하며 當人(당인)은 金(김)의 幾部分(기부분)을 政府(정부)에 納上(납상)하기를 請願(청원)하엿스나 政府(정부)는 不許(불허)하다

가장 危殆(위험)한 것은 敵輩(적배)의 利用(이용) 儒敎擴張(유교확장)은 可(가)하나 政治(정치)에 容?(용?)함은 危險(위험)

某氏談(모씨담)

李炳憲事件(이병헌사건)에 關(관)하야 某氏(모씨)는 가르되

事件(사건)이 預期(여기)와 如(여)히 重大(중대)치 안음은 多幸(다행)이외다, 李(이)의 根本精神(근본정신)은 儒敎擴張(유교확장)의 一念(일념)이 有(유)하엿슬 뿐임을 諒(양)하오마는 이것이 不幸(불행)히 敵輩(적배)와 奸邪類(간사류)의 利用(이용)한바이 됨은 甚(심)히 危殆(위험)한 일이오, 李(이)가 某某氏(모모씨)게 通情(통정)한 말 中(중)에 同化(동화)니 日鮮融合(일선융합)이니 하는 思想(사상)이 잇섯슴을 보아도 그 前途(전도)를 想(상)할 수 잇스리다, 이는 全(전)혀 그 沒常識(몰상식)에 起因(기인)함이니, 宗敎的 發展(종교적 발전)을 期(기)하랴면서 政治家(정치가)를―(일)더욱이나 敵總督敵內閣(총독부내각)을 끼고 他敎(타교)를 排斥(배척)하며, 宗敎(종교)의 發展(발전)을 民族(민족)의 自由(자유)와 밧고랴는 心思(심사)는 可憎(가증)하외다, 今後(금후) 飜然覺悟(번연각오)하야 正正堂堂(정정당당)한 길에 나가 如彼(여피)한 政治陰謀的 手段(정치음모적 수단)을 바리고 오직 學文的 宗敎的 立地(학문적 종교적 입지)에서 文化的 運動(문화적 운동)을 한다 하면 多幸(다행)이외다, 다만 이런 者(자)를 利用(이용)하랴고 墓地規則(묘지규칙)을 뒤지벗다, 들추엇다 하는 敵輩(적배)의 心理(심리)는 可笑(가소)롭기도 하고 可憎(가증)하기도 하오 云云(운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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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송님의 댓글

일송 작성일

진암 이병헌 선생의 친일에 대한 반론
☞ 경남 함양군 출신의 한국 근대 유학자 진암 이병헌(1870~1940)선생에 대해 2006년 6월 21일 부산에 거주하는 이영래씨(민족 문제 연구소 부산지소 회원)가 친일파로 지목하여 함양군에서 역사 인물공원에 세운 선생의 흉상을 철거하라는 건의에 대해
  본인(이용호)은 후손의 한사람으로서 심히 우려하여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기 위해 다음과 같이 글을 올립니다.
  구체적으로 보면 이영래 씨가 친일파로 매도하는 증거로 서울대학교 교수 금장태 박사가 유교개혁과 이병헌 이라는 표제로 저술한 내용중(P58~P63). 당시 상해 임시정부 경무국장으로 있던 김구 선생이 친일 거두라며 밀고가 들어왔다며 선생을 감금하여(1920.4.1~4.9일(음))심문한 내용을 앞․뒤 내용은 무시하고 당시 독립 신문에 보도된(5월27일(양)) 내용만을 사실인양 오도하여 함양군에 진정한 내용임.
  이에 선생에 대한 친일관련 지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구분하여 볼수 있겠습니다.
  1. 이병헌 이 조선총독부와 일본정부에 여러 차례 청원서      를 제출하였던 사실
  2. 당시 친일 유교단체인 대동사문회 와 교류하였다는 사실
  3. 친일 인사로 의심을 받아 상해 임시정부에서 감금되어      심문을 받았던 사실
    첫째, 조선총독부와 일본정부에 여러 차례 청원서를 제출    하였던 사실에 대한 바로잡음.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의 식민 정책을 조선의 사회적, 문화적 기반인 유교 조직을 통제하기 위해 1917년 종교 령으로 유교를 종교단체에서 제외 시켰으며 향교 재산 관리규정으로 향교 재산관리를 행정기관에 귀속시키고 공동묘지 관리규칙으로 씨족 중심의 전통적 묘지제도를 부락 중심으로 변혁하고자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선생은 조선인의 정신적 기반인 유교 전통을 수호하기 위해 평생토록 조선총독부와 일본정부에 청원서를 거듭 제출함으로써 일제의 통제 정책에 상반하여 유교의 종교적 자율성을 확보하고 전통제도의 유지를 요구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청원서 제출에 대해 총독부와 내각을 끼고 활동했다고 지적하는 것은 매우 악의적 적대감이 아닌지 의심이 됩니다.
  또한 청원서를 제출하면서 총독부 정부나 대관이라 일컬은 사실에 대해 조선 2천만의 공동의 적을 인정했다고 지적하는 것은 당시 국내에 살면서 식민정부와 교섭하여 활동하던 사람으로서는 불가피한 호칭이었음을 외면하고 무리한 원칙론을 강요한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선생이 일제의 총독부나 일본내각에 청원한 것은 오직 유교 전통의 확보를 위한 노력이었지 일본의 식민통치 정책에 영합하는 활동이 아니었으며 친일이라는 규정은 어불성설이다.
  둘째, 당시 친일유교단체인 대동사문회와 교류하였다는 사실에 대한 바로잡음.
  선생은 1920년 1월 중국방문길에 서울에서 머무를 때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정만조(1859~1936, 경학원대제학 명륜학원 총재 역임)가 찾아와 1919년 11월에 조직한 대동사문회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대동사문회를 조직하여 유교 개혁운동을 표방하였으나 그 방법과 목표에서 선생과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
  대동사문회는 정만조를 비롯하여 어윤적, 이범철, 최승년, 박로학, 송지산 등이 간부로 있었으며 총독부의 동화정책에 협조하는 친일 유림 조직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선생은 대동사문회 조직목적이 사문(유교)을 지키는 것임을 인정하여 대동사문회를 방문도 하였으나.
  그 간부들과 유교 개혁의 일을 논의하면서 그들이 속된 학문에 빠져있어서 일을 같이할 수 없음을 탄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유교 개혁의 일념으로 이번 중국방문에 곡부의 대성전에 있는 공자의 진상을 모사 해오는 일을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 정만조 에게도 공자의 진상을 회당에 봉안하고 경전을 구해서 국내의 명사들과 연구 할 것을 제안하여 대동사문회 간부들이 연명한 공문을 받아 유교 개혁에 참여할 수 있게 연성공부와 강유위 에게 공문을 전달해 주는 정도였으며 대동사문회 의 일원으로 참여하여 활동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셋째, 친일 인사로 의심받아 상해임시 정부에서 감금되어 심문을 받았던 사실에 대한 바로잡음.
  1920년 3월 선생이 3번째 중국 방문 중 상해에서 평소 친교가 깊은 박은식(임정 2대대통령)을 비롯하여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이시영, 김일두, 김창숙 등을 만나보고난 몇 일후 선생은 일본 비밀 탐정원으로 왔다는 오해를 받아 당시 임시정부 경무국장인 김구 선생에 의해 9일(4월 1일~4월 9일(음))동안 감금된 상태에서 엄중한 심문을 받았던 일이 있습니다.
  4월 1일 김창숙 을 만나본후 다른 분을 만나러 길을 걸을 때 10여명의 청년들에 의해 연행되어 심문을 받게 되었다. 내용인즉 당신이 일본을 위하여 정탐을 하러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서 사실대로 말하라며 윽박질러.
  선생이 이치에 근거해서 소명코자 하였으나 듣지 아니하고 비록 폭행은 없다 하드라도 핍박하는 것이 흡사 전일 국내에서 악곤배들이 산촌의 죄 없는 백성들을 다루는 것 같다고 김구 선생에게 한말이 과장되어 독립신문에는 앞․뒤 내용은 무시하고 조선의 독립 운동가를 불량선인 강도 배라 하였다고 보도된 내용임.
  4월 2일 김구 선생은 소지하고 있던 일기를 비롯한 저술(유교복원론)『연성공부와 강유위에게』, 총독부와 일본내각에 보낸 대선근본정책 전재유교론 등 문건을 살펴보고는 대선근본정책 전재유교론에서 문․답 식으로 기술된 내용 중
  󰡒문󰡓이번소요(3.1독립운동)이후 묘당 방침은 그 근본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라는 내용 중 3.1운동을 소요라 표현된 글을 보고는 처음에는 대노하여 험악한 말들도 오고 갔으나
  내용과 설명을 듣고는 유교가 독립운동에 장애물이된즉 이를 버려야 하나 선생의 논하는 바는 이치가 있는 것 같아 당국에서 재삼 헤아려보고 있다고 하여 이해를 하기 시작하였다.
  소요란 말이 처음 등장한 것은 3.1독립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우리의 고장인 함양에서도 3월 12일 장날을 기회로 평소 같은 면에 거주 하면서 잘 알고 지내던 친구인 참봉 김한익 씨가 주동이 되어 봉기를 하다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주변 사람들이 총에 맞아 죽거나 부상을 당한 분들이 같은 면에 거주하면서 잘 알고 지내던 분들이었다.
  선생은 1918년 12월 모친상을 당하여 상주로서 두문불출 하며 지내다 이와 같은 소식을 전해 듣고 만세운동에 동참하지 못함을 탄식하며 이에 선생으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총독부와 일본정부에 우리2,000만 동포를 폭압과 억압으로만 다스릴 것이 아니라 평생의 소망인 유교의 복원에 의한 지성의 근본사상으로 정성을 다해 대동사회로 이뤄 일본의 대향교정책과 교육정책 등을 론하고 옳은 방향을 제시하는 자문, 자답 식으로 작성된 일종의 진정서라 할 수 있다.
  4월 3일 김구 선생이 수하 사람을 시켜 거쳐할 여관을 정해주면서 법계(불란서조계지역)를 벗어나지 않도록 당부하며 배려해 주기 시작하였다
  4월 4일에는 김구 선생과 함께 대세계극장을 구경하고 돌아오기도 하였으며
  4월 7일 에는 유모가 찾아와서 행이를 챙겨 영. 계 동안리 여관(연행되기 전 거처한 숙소) 으로 옮겨가기를 청하였다
  4월 9일 유모가 다시 찾아와 언제든지 편리한 날짜에 떠나셔도 좋다는 김구 선생의 말을 전해 주었다
  이로서 모든 오해가 해소되어 푸려나게 된 이후 김구 선생과는 각별한 관계를 유지해 왔던 사실을 아래에 기술한 내용만으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선생은 배산 서당(공자교한국지부) 을 건립하여 문묘를 모실 공자 진상을 모사해 오기위해 1923년 4차 중국방문길에 올라 곡부 대성전에 모셔있는 공자 진상을 사진으로 촬영한 것을 김구 선생이 당시 중국의 유명한 화공을 시켜 서양기법으로 그려 주었으며.
  임시정부 용인들인 박은식, 이시영, 조완구, 김구 선생 등은 선생이 건립한 배산 서당 낙성식에 축사를 지어 주기도 하였다.
  선생이 공자 진상을 모사하여 귀국할 때는 김구, 조완구, 이시영 선생 등 수십 명의 임정요인들을 대동하고 포동항 부두까지 나와 배에 오르는 선생을 전송해 주기도 하였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볼때 한때 친일인사로 의심을 받았지만 그의 행적에 임시정부에 의해 친일인사가 아님을 확인받은 것과 동시에 임시정부로부터 각별한 예우를 받은 것으로 확인됩니다.
  다음은 1962년 9월 3일자 동아일보에 보도된 김구 선생이 선생에게 보낸 서한을 소개해 본다.
  《이서한은 연금에서 풀려난 2개월 후인 6월 21일(음)자 서한내용임》
  片紙(편지)를 仰讀(앙독)하고 많히 感謝(감사)하였습니다.
  이와 갖치酷熱(혹열)한 地帶(지대)를 免(면)하시고 靑海上(청해상) 納凉臺(납양대)에 日日(일일) 中華(중화)의 文聲(문성)을 더부러 道理(도리)를 談討(담토)하심은 欽荑不己(흠이불기)하나이다
  兼(겸)히 先生(선생)님을보내고도 於心未安(어심미안)한것은 行資(행자)【노자돈】가 不足(부족)하심일너니 其亦免困(기역면곤)이 되시난 모양이오니 감사하외다.
  生(생)은 省事依安而兒母俱病(성사의안이아모구병)에 依然(의연) 苦悶過去(고민과거)하오니 苦海(고해)에 眞情(진정)을 맛보나이다.
  先生(선생) 今行(금행)은 將來(장래)에 國家獨立(국가독립)에 元氣(원기)를 養(양)하며 文化發展(문화발전)에 羅盤(라반)을 備(비)함과 如(여)히 肝要(간요)한 中(중)에 各宗敎(각종교)의 向背(향배)는 大略(대락) 定向(정향)이 有(유)하나 至於儒敎(지어유교)하야는 我東(아동)에 祖敎(조교)어날 先生(선생)이 아니엿스면 大不幸(대불행)을 致(치)할번 하엿나이다
  今日(금일) 東亞報(동아보)를 見(견)한즉 所謂(소위) 日當局(일당국)이 孔子廟(공자묘)의 私設(사설)을 絶對不許(절대불허)한다난 理由(이유)난 經學院(경학원)에서만 할일이라고 하였습니다.
  先生(선생)님 經營(경영)하시난 事業(사업)에난 妨害(방해)를 아니하겠난 지요
  恭諒(공양)하시옵소서 宅信一度(택신일도)를 同封(동봉)하오니 보시고 舊衣貽過(구의이과) 如敎實施(여교실시)하나이다.
  萬事(만사)를 잘造成(조성)하여 수히 回駕(회가)하시옵소서
  餘祝道體萬安(여축도체만안) 不備(불비)
  生(생) 金九(김구)  六月(6월) 二十一日(21일)拜(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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