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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스펀의 서브프라임 해법, 세계지식포럼서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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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세계지식 댓글 0건 조회 715회 작성일 07-08-28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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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지식포럼 2007 / speaker's insight (4) - 앨런 그린스펀 前 FRB 의장◆
"지구촌 유동성 호황은 계속될 수 없다. 호황이 지속되는 동안 이를 즐겨라(A global liquidity boom would not go on forever. Enjoy it while it lasts)."
 
지난 6월 앨런 그린스펀 전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81)이 한 콘퍼런스에서 한 말은 세계적인 뉴스가 됐다. 미국 국채금리는 5년래 최고치를 경신했다. 저금리, 유동성 장세가 끝날 것이라는 경고를 반영한 것이었다.
 
은퇴를 했어도 사라질 줄 모르는 막강한 뉴스메이커이자 세계적인 영향력의 소유자, 앨런 그린스펀. 그가 10월 16일 열리는 제8회 세계지식포럼의 특급 연사로 참여한다.
 
그가 바라본 21세기 '부 창조 방정식'은 무얼까. 서브프라임 사태에 대해 그는 어떤 솔루션을 제시할까. 글로벌 금융전쟁이 치열하게 펼쳐지고 있는 세계 경제전쟁에서 살아남는 비법은 무엇일까. 인플레이션 압력에서 벗어나 지구촌 번영을 이끌 경제정책의 새로운 패러다임은 무얼까.
 
그린스펀은 경제를 번영으로 이끄는 경제정책의 핵심은 현장을 정확히 이해하고 분석해내는 '현장지식'과 유연한 사고, 원칙에 충실한 소신, 투명한 정책운영에 있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18년 6개월 동안 로널드 레이건, 조지 H 부시(아버지 부시), 빌 클린턴, 조지 W 부시까지 역대 네 대통령의 지지를 받으며 미국을 역사상 최장기 호황, 번영의 시대로 이끌 수 있었다.
 
1987년 8월 FRB 의장이 된 뒤 3개월 만에 그가 맞이한 것은 '블랙 먼데이'사태였다. 다우존스지수가 500포인트(22%) 급락하며 주식시장이 공황의 늪에 빠진 것이다. 그린스펀은 "FRB는 유동성 공급자"라며 금리를 내리고 돈을 풀어 위기를 넘겼다.
 
90년 8월 걸프전쟁이 발발하면서 유가가 급등하고 물가가 치솟았다. 경기는 악화됐고 선거를 앞두고 있어 다급해진 조지 H 부시는 금리 인하를 요청했다. 하지만 그린스펀은 물가를 잡아야 한다며 긴축정책으로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93년 빌 클린턴 대통령이 금리 인하를 요청했지만 이것도 거절했다.
 
97년 아시아 금융위기가 발생하자 "미국만 번영의 오아시스로 남을 수 없다(The U.S. couldn't remain an oasis of prosperity)"며 세 차례 금리를 내려 세계 경제를 살리는 구원투수로 나서는 소신을 보였다.
 
2000년 닷컴버블 붕괴와 2001년 9ㆍ11테러로 미국은 물론 세계 경제가 요동치자 6.5%에 달하던 금리를 1%까지 내려 위기를 진화시켰다. 오히려 이 같은 조치는 세계 경기 회복의 청신호로 작용했다.
 
그린스펀의 이 같은 위기 대응 능력과 소신은 어디에서 나왔던 것일까.
그는 "경제흐름, 즉 경제 현장을 정확히 알고자 했던 노력과 통찰력에 있었다"고 강조한다.
 
그의 부인이자 NBC방송 기자인 앤드리아 미첼은 "그린스펀은 평생 경제가 어떻게 긴밀하게 연결돼 움직이는지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왔다"며 "현재도 그 같은 노력을 멈추지 않고 있다"고 소개한다.
 
따라서 그에게 중요한 것은 통계보다 경제흐름을 포착하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월가는 물론 금융계 최고경영자, 심지어 기업의 CEO들과 채널을 긴밀하게 유지했다.
 
 수시로 통화하고 수시로 만나 현장의 미세한 움직임을 짚어냈을 뿐만 아니라 가장 효과적인 대응책을 제시했다.
 
그는 경제 모델에 의존하지 않았으며 이론이 설명하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경제현상을 찾아내길 좋아했다.
 
 통계를 믿지 않았으며 숫자보다 직관과 통찰력을 존중했다. 그의 해법 제시는 '선제 조치'방식이었다. 사태가 발생하기 전에 경고해 이를 막는 방식이다.
 
경기과열이 우려되면 금리를 미리 올리고 경기침체 조짐이 보이면 금리를 미리 내리는 선제적 금리정책을 구사했다. 여기에 그가 모호한 비유와 수사로 선보인 '간접화법'은 정책 변화를 미래 예측하고 대비할 수 있도록 시장참가자들에게 여유를 가져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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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스펀의 이 같은 행동은 자신이 경제이론가가 아니라 실무 전문가로 행동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경제는 생물과 같아 목표를 설정해 경제를 운용하는 게 아니라 바뀌는 경제상황에 가장 적합한 '투명한 정책'이란 자양분을 필요로 한다는 지적이다.
 
그래서 그는 경제현장에 흐르는 실무지식, 유연한 사고를 토대로 한 금리정책의 유연성, 투명한 정책집행, 소신 있는 행동을 금과옥조로 여겼다.
 
그가 소신 없이 정권의 눈치를 보며 정부가 원하는 대로 금리정책을 폈다면 미국 경제는 어떻게 됐을까. 그의 소신은 중앙은행의 독립성과 중립성을 높여줬다.
 
월가 사람들은 이 때문에 그린스펀을 교활하리 만큼 유연했던 '여우'라고까지 표현했다. 그린스펀의 유연성은 음악에서 나온다는 평가가 있다.
 
그의 어린시절 꿈은 경제전문가였지만 클라리넷을 선호하면서 1943~44년 줄리아드음악원에서 공부를 한 뒤 전문 음악가로 활동한다.
 
그러나 곧이어 원래의 꿈을 찾아 뉴욕대학 경제학과에 입학해 학사, 석사, 박사과정을 마친다. 1848년 대학졸업 후 1953년까지 그린스펀은 미국을 대표하는 민간 경제예측기관인 콘퍼런스보드에 입사해 경제분석가 훈련을 쌓는다.
 
이어 1954년 부터 87년 FRB 의장이 될 때까지 그는 경제컨설팅 회사인 '타운센드-그린스펀'을 설립해 CEO로서 실무전문가의 길을 걸으며 JP모건, 모빌, 알코아, 제너럴 푸드, 캐피털시티즈 등 다수의 기업 임원으로 활동하면서 탄탄한 실무능력을 쌓는다.
 
1974~77년 포드정부의 대통령 경제자문위 의장을 맡은 것을 제외하면 그는 항상 현장에 있었다.
 
그린스펀의 유연성은 그의 독특한 친화력에서도 엿볼 수 있다. 평생 공화당원으로 살았지만 민주당 정부인 클린턴 정부조차 그를 등용했으며 여야를 초월해 적을 만들지 않았다. 강력한 카리스마와 리더십, 친화력으로 FRB를 장악했던 것이다.
 
그린스펀은 다음달 자서전인 '격동의 시대 : 새로운 세계에서의 모험(The Age of Turbulence : Adventures in a New World)'을 펴내 자신의 FRB 의장 경험담을 전할 예정이다.
 
세계적인 거물, 앨런 그린스펀이 제8회 세계지식포럼에서 '그린스펀과의 솔직 대화'를 통해 자신이 생각하는 부 창출 방정식을 전한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문제 등 최근 금융이슈에 대해서도 입장을 전한다. 70분 동안 그가 전할 소름끼칠 정도의 통찰력과 혜안을 직접 체험해 보길 기대한다.
[이 게시물은 전체관리자님에 의해 2007-10-10 06:59:16 나도한마디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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